성경 : 마태복음 5장 7절
제목 : 긍휼히 여기는자의 복
여러분! 진짜 아름다운 교회는 어떤 교회일까요? 진짜 건강한 교회는 어떤 교회일까요?
우리는 예수그리스도께서 산상수훈에서 말씀하신 팔복에 대해 말씀하고 있습니다. 첫째의 복은 심령이 가난자의 복 둘째는 애통하는 자가 복이 있다 셋째는 온유한자가 복이 있다 넷째는 의에 주리고 목마른자가 복이 있다
고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셨습니다. 첫 번째부터 네 번째까지는 팔복에서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속에서 드러는 나의 특성들을 말씀하고 있는것입니다. 다시말해서 내가 하나님에서 나자신의 모습을 비추어볼 때 하나님의 성품을 닮아가는 모습에서 나타나야하는 것이 오직 하나님밖에 없습니다. 하는 심령의 가난함 그리고 하나님 밖에 없는 사람은 죄에 대하여 애통하면서 회심이 일어나면서 하나님을 보게 되고, 죄에 대한 애통함을 통해 내면의 강한 힘인 예수그리스도를 통한 강한 능력과 힘이 드러나는 것이 온유함이라는 것입니다. 외저으로 얼굴이 선하고 유해서 온유함이 아니라, 내면에서 나오는 예수그리스도의 향기로 드러나는 것을 통해 온유함을 가질 때 의에 배고파하고 갈망하고자하는 마음을 가지면서 말씀에 순종까지 갈려고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나와 하나님과의 관계속에서 나타나는 첫 번째부터 네 번째까지 자신의 내면의 기초와 바탕으로 가져야하는 행동을 표현한 말씀입니다.
그리고 다섯째부터 여덟 번째의 복은 자신이 아닌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 즉 대인관계속에서 타나는 성도들의 특징을 예수님께서 말씀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먼저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다는 말씀을 하기전 예수님당시의 시대적 배경이 어떠했는지를 알 필요가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긍휼과 그 시대에서 긍휼은 차이가 너무나 큼을 알수 있습니다.
로마가 말하는 평화는 팍스로마나였습니다. 평화는 평화인데 전쟁과 무력으로 이룬 평화입니다.
싸움이 없는 평화, 전쟁이 업는 평화가 아니라, 사람을 죽이고 그리고 칼과 창과 활을 가지고 땅을 차지하면서 넓혀가는 전쟁이었습니다. 누가 로마를 건드리면 로마는 그 이상의것으로 반드시 보복을 하고, 전쟁을 하면서 살육하고 싸우고 죽이면서 쟁취하는 것이 정의 였습니다. 그래서 긍휼 즉 불쌍히 여기는 것은 너무나 어려운 시대였습니다.
플라톤이나 아리스토텔레스같은 철학자들은 긍휼에 대한 생각이 얼마나 부정하고 낯설게 생각한지 모릅니다. 이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 오직 건강한 자녀만이 키울수 있는 책임이 있다”라고 말입니다.
반대로 건강하지 못한사람이나 장애인은 키울필요는 말이 되겠죠. 얼마나 사회적 분위기가 긍휼이라는 단어는 너무나 낯선 단어였을것입니다.
그렇다면 이런 시대적 상황에서 1. 예수님께서는 왜!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다 라고 말씀하셨을까?
예수님 당시 율법과 종교 지도자들의 배타적 신앙관을 배운 유대인들에게는 타인에 대한에 대한 용서와 관용 그리고 긍휼이라는 개념이 희박했고 무지했습니다.
유대인들의 배타적 신앙관 마5:38 또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갚으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느나 예수님께서는 구약의 동해보복법을 말씀하십니다. 눈은 눈으로 갚고, 이는 이로 갚으라는 말씀이 구약의 율법입니다. 조금도 긍휼을 베풀지 않습니다.
또 예수님께서는 현장에서 간음한 여인을 바리새인들이 예수님께로 데리고 옵니다. 그리고 긍휼을 베풀지 않는 모습으로 이 간음한 여인을 어떻게 했으면 하는지를 묻습니다.
구약의 율법에는 간음한여인은 반드시 돌로 쳐서 죽이게 되어있습니다.
레 20:10 누구든지 남의 아내와 간음하는 자 곧 그의 이웃의 아내와 간음하는자는 그 간부와 음부를 반드시 죽일지니라 .
이런 유대인들의 시대적 배경은 오직 남이야 어떻게 되든말든 자기 자신만 경건한자로 하나님앞에 서려는 이기적인 마음으로 가득차 있었습니다. 종교지도자들에 모습에서 얼마나 간증스럽고 외식적이고 형식적인 모습인지 모릅니다.
왜! 예수님께서 긍휼히 여기는자는 복이 있다고 말씀하셨을까? 배타적 신앙관을 가진 유대 종교지도자들과 유대인들처럼 자기 의를 드러내고 이기적인 신앙을 가지고 살지 말라는 것을 제자들에게 가르쳐주고자했던것입니다.
신자들안에서도 이기적이고 배탁적인 신앙을 가지고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들이 교회안에 많이있습니다. 특별히 교회안에 중직자일수록 세상적인 잣대와 논리로 오히려 무정하고 자비가 없고 긍휼히 없고 용서가 없고 세상적인 방법으로 하는 신자들이 너무 많다는것입니다.
특별히 예수님께서 마5:7절에서 말씀하시고자 의미는 다른사람과의 관계속에서 “긍휼히 여기는 마음을 가지고 살아가라는 것입니다. 성도님! 교회는 세상의 기관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친히 만물의 으뜸이 되시고 궁극적으로는 온 세상이 십자가를 통해 하나님과 화평을 이루는 곳이 바로 교회입니다. 그러므로 교회와 성도는 절대로 세상적인 논리와 방법과 가치로 교회를 세워나가서는 안됩니다. 반드시 하나님의 방법과 뜻대로 세워나가야 합니다.
지금보 더많이 우리 교회안에 긍휼히 여기는 마음, 불쌍히 여기는 마음으로 나보다 다른 사람을 더 생각하며 살아가야 할줄 믿습니다.
그러면 긍휼이란 무엇인가?
마5:7긍휼히 여기는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임이요 라고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긍휼 / 헬: 엘레오스 라는 의미에서 ”동정하다“, ”자비(인애)”입니다. 엘레오스는 히/ 라함, 헤세드 두가지 의미를 포함하는데 라함은 상대방의 처지를 깊이 이해하고 그들의 입장에서 슬픔을 느끼는것이고, 자비’란 ‘헤세드로 여기서 한걸음 더 나아가 상대방의 감정에 공감할 뿐 아니라 상대방의 어려움을 타개하기 위하여 실제적으로 행동하고 도와주는 것을 의미합니다
다시말해서 긍휼은 그들의 비참한 입장을 이해하고 슬퍼하고, 그것을 한걸음 더 나아가 비참한 상황을 이겨낼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을 긍휼이라고 합니다.
긍휼히 많으신 예수님께서는 라함인 슬픔을 느끼고 헤세드 인애즉 어려운 상황을 도와주는 행위까지 예수님께서는 성경에서 많이 보여줍니다.
누가복음 8장 1-11절까지 예수님께서 성전에 들어오는 것을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봅니다. 그리고 현장에서 간음하다가 잡힌 여인을 예수님께 데리고 옵니다. 예수님께서 이 여인을 어떻게 처리하는지 보면서 꼬투리를 잡아 율법을 어긴 자로 예수님을 즉결심판 즉 죽임으로 몰아갈려는 계획을 세웁니다.
눅8:3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음행중에 잡힌 여자를 끌고 와서 가운데 세우고
4예수께 말하되 선생이여 이 여자가 간음하다가 현장에서 잡혔나이다
5모세는 율법에 이러한 여자를 돌로 치라 명하였거니와 선생은 어떻게 말하겠나이까
바리새인은 예수님께 간음한 여인을 끌고와서 이 여자가 간음하다가 현장에서 잡혔는데 모세의 율법에서는 여자를 돌로 치라고 말씀하셨는데 선생인 예수님은 이 간음한 여인을 어떻게 처리하시겠습니까? 하고 묻고 있습니다.
여기에는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은 긍휼히 자비와 용서라는 단어는 전혀 찾아볼수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을 그리고 그 주변에 있는 사람들을 향하여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7그들이 묻기를 마지 아니하는지라 이에 일어나 이르시되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 하시고
9그들이 이 말씀을 듣고 양심에 가책을 느껴 어른으로 시작하여 젊은이까지 하나씩 하나씩 나가고 오직 예수와 그 가운데 섰는 여자만 남았더라
너희중에 죄없는자가 먼저 돌로 치라는 것입니다. 말씀하십니다. 이들의 양심을 먼저 건드립니다. 이들은 사람들에게 들키지않았기 때문에 걸리지 않았을뿐 이들도 간음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래서 양심의 가책을 느끼게 됩니다.
그리고 한둘씩 떠나갑니다. 이제 예수님과 간음한 여인만 현장에 남아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돈이없고 힘이 없어 먹고 살기위해 자신의 몸을 바칠 수밖에 없는 비참한 여인에게 무엇이라고 말씀하십니까?
10예수께서 일어나사 여자 외에 아무도 없는 것을 보시고 이르시되 여자여 너를 고발하던 그들이 어디 있느냐 너를 정죄한 자가 없느냐
11대답하되 주여 없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가서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 하시니라
너를 고발했던 사람들이 어디있느냐? 너를 정죄했던 자들이 어디있느냐? 묻습니다. 그리고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않을테니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이제는 간음을 멈추고 새로운 삶을 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용서와 사랑을 베푸시는 긍휼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여인을 불쌍히여겼습니다. 이 여인은 정죄하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다시 새로운 사람을 살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이 삶의 목적입니다. 그렇습니다. 긍휼히 여긴다는 것은 불쌍히 여기는 마음을 갖습니다. 그리고 용서와 함께 가는 것입니다.
여러분! 어쩌면 우리가 현장에서 잡힌 간음한 여인일수 있습니다 우리안에 수많은 죄의 목록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에게 들키지만 않았지 얼마나 많이 죄의 본성대로 살아가고 있습니까? 만약 우리가 서기관 바리새인들이 우리를 간음한 현장에서 우리를 잡아 데리고 나온다면 우리는 구약의 율법대로 마땅히 돌로 맞아 주어야 할 존재들입니다. 그러나 우리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죄를 알고 계시면서도 불쌍히 여기시고 긍휼히 여기셔서 우리가 죄를 고백할때마다 용서해셔서 흰눈처럼 깨끗해 주심을 감사하는것입니다. 이것이 얼마나 큰 은혜인줄 모릅니다.
저역시 예수님의 긍휼이 없다면 이 강단에서 예수그리스도의 복음을 증거할수 없는 사람중에 한 사람일것입니다.
구약의 율법은 “이에 이, 눈에는 눈으로 하라 하지 않습니까?”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인애 즉 자비인 긍휼을 베푸셨다는 것입니다
구약의 율법은 마5:38 또 눈으로 눈으로 이는 이로 갚으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신약의 율법의 완성이신 예수님은 새 계명을 말씀하십니다. 마 5:39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악한 자를 대적하지 말라 누구든지 네 오른편 빰을 치거든 왼편도 돌려 대며
여러분! 예수님께서 믿는 사람은 오른쪽을 뺨을 맞았으니까? 왼편도 때리라고 얼굴을 돌려 대라는 말씀으로 해석해서는 안됩니다. 그것이 자비와 긍휼로 이 말씀을 오해할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마26:67절에 대제사장들이 예수님을 손바닥으로 뺨을 때려지만 다른 쪽 뺨을 돌려대지 않았습니다. 오른편 뺨을 맞아으니까 왼쪽 뺨을 대라는 그런 의미로 말씀하신 것이 절대 아닙니다.
그러면 이 말씀의 본질적 의미는 무엇입니까? 악한자가 대적하여 복수할려고 할때에 너희는 그렇게 악한자들처럼 복수할려고 하지 말라는 말씀의 의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5:38.39절 그 뒤에 마5:44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고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대적하는 자들을 위하여 기도하는 것이 긍휼입니다. 원수를 위해 기도하는 것이 긍휼입니다. 제자들에게 오늘날 성도들에게 인애하는 마음 즉 자비와 긍휼의 마음을 가지라는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생명의 말씀은 율법을 참뜻을 다시 재해석해서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고자 본 의도를 새롭게 조명해주고자 한것입니다. 율법은 죄를 깨닫게 하는것이라면 예수님의 복음은 죄를 깨닫는 것을 뛰어 넘어 긍휼과 자비를 베풀어 배타적이고 이기적이고 자신밖에 모르는 이시대에 인애인 긍휼과 자비그리고 용서인 목적인 복음을 가르치고 하셨던것입니다. 긍휼과 용서는 함께 가는것입니다.
2. 왜! 예수님께서는 긍휼히 여기라고 말씀하십니까? 예수님은 인애를 원하기 때문
호6:6 나는 인애를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아니하며 번제보다 하나님을 아는 것을 원하노라
여기서 인애는 히/헤세드 자비, 긍휼, 사랑입니다. 그러나 인애는 힘도 있습니다. 이 힘은 폭력으로 쓰는 힘이 아니라, 사랑을 실천하는 힘을 말합니다.
예수님이 원하시는 것은 형식적인 제사인 번제를 드리는 것보다 먼저 긍휼히 여기는 자비로운 마음을 가지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말씀 속에서 하나님께 대한 예배의 형식은 갖추어 있습니다. 그리고 열심이고 특심입니다.
오늘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세상은 모든 것이 자기애에 바져있습니다 자기 외에는 관심을 갖지않습니다. 아무런 관계가 없는 사람처럼 교회는 교회이고 나는 나이고, 다른 형제.자매들과의 아픔은 나와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고 생각하는 것이 성도들안에 만연해서는 안됩니다.
예수님께서는 번제와 같은 제사를 드리는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서로 지체들간에 안부도 물어봐주고 관심도 가져주고, 찾아가 봐주고 힘들 때 위로와 함께 기도해주고 격려해주는 것이 필요하다는것입니다. 그런 것이 긍휼히 여기는 마음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면 왜! 우리가 긍휼을 베풀어야 합니까? 긍휼은 다른사람을 용서할수 있기 때문.
마5:4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임이요
인간에게 긍홀을 베푸는 자는 다른 인간으로부터 긍홀히 여김을 받는다는 의미가 아니라 긍홀의 근원이신 하나님으로부터 긍홀히 여김을 받는다는 의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이 살아가는 이 세상의 삶에 있어서는 물론 마지막 날의 심판에 있어서도 긍홀을 푼 자를 기억하시고 그들에게 긍홀로 갚아 구원으로 이끌어 주실 것입니다. 내가 다른 사람을 불쌍히 여길 때 하나님께서 나를 불쌍히 여겨주십니다.
에수님께서는 긍휼히 여기는 부분까지만 아니라, 긍휼에는 반드시 용서가 뒤따라가야 합니다.
대인관계속에서 살다보면 어려운점이 하나둘이 아닙니다. 도저히 용서할수 없는 일들이 얼마나 많이 생깁니까? 직장 상사로부터 때로는 가정에서도 교회안에서 성도간의 관계속에서도 말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용서에 대해 말씀하십니다.
마6:14 너희가 사람의 잘못을 용서하면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도 너희 잘못을 용서하시려니와
15 너희가 사람의 잘못을 용서하지 아니하면 너희 아버지께서도 잘못을 용서하지 아니하시리라.
사람이 싫다는 것은 용서할수 없다는 것은 “나와 다르다는”것에서 시작됩니다. 성격, 기질, 일하는방식, 생각의 차이 등 다르다는 것입니다. 결혼에 비유를 들자면 남녀가 서로 뜨겁게 사랑합니다. 뜨겁게 사랑했기 때문에 결혼을 했습니다. 결혼을 하고 함께 살다보니까 서로 다른것때문에 서로가 지옥을 경험하게 되고, 점점 힘들어 하지않습니까? 심지어는 이혼까지 하지 않습니까? 여러분! 사랑할때는 서로 다른것도 좋아보이고 사랑스럽게 보입니다.
그런데 사랑이 식어지면 나와 다름에서 싫어지게 됩니다. 나와 다르기 때문에 못견디어 하는것입니다. 그래서 원망도 하고, 분노도 내고, 못견디는 것입니다. 원인이 무엇입니까? 사랑이 식어버렸기 때문입니다.
용서하지 못하는 것은 그 사람이 싫어지는 것에 대한 문제는 “다른것에 있는 것이 아니라, 내 사랑이 식어졌구나 ” 내 사랑이 식어졌기 때문에 이런 문제가 있구나 하는 것을 자신안에 있음을발견해야 합니다.
용서하지 못하는 사람에게 문제의 원인을 찾는 것이 아닙니다. 세상의 방식은 자꾸 상대방을 지적하고 보게하면서 너가 먼저 미안해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나도 용서하겠다는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그렇게 말하지 않습니다. 늘 나로부터 비롯되는 나의 연약함, 부족함을 솔직하게 하나님께 기도로 토로하라는 것입니다.
저는 대인관속에서 이렇게 기도한적이 있었습니다. “주님! 저는 저사람을 도저히 용서할수 없습니다. 무슨말을 해도 도저히 이해를 못하고 믿지를 못합니다. 도저히 용납이 안됩니다. ”라고 기도했습니다.
목회가 너무나 힘이 들었습니다. 솔직하게 목회를 그만 두고 싶은 생각까지 했습니다. 저는 문제를 나를 보지 못하고 자꾸 상대방을 보았던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계속 기도를 시키셨습니다. 어느날 성령께서 저에게 조명해주시는데 문제의 뿌리가 상대방이 아니라, 나에게 있음을 발견했습니다. 문제의 원인이 무엇인가? 그것은 상대방을
사랑하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문제의 원인을 안후 저는 기도를 바꿨습니다. 주님! 제가 저 사람을 사랑하게 해달라고 기도하면서 사랑의 관점으로 말로도 표현하고,,행동으로도 사랑할수 있도록 행동을 했습니다. 그러면서 내안에서 원망도 하지않고, 분노에서 벗어났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저의 기도를 들으시고 문제의 모든 부분에서 해결해 주셨습니다.
용서할수 없는 사람을 대하고 문제를 풀어갈때에는 상대방을 보지마시고, 자꾸 나를 볼수 있도록 해야한다는 것입니다. 용서하는 부분에서 문제를 어렵게 만들어가는 것은 나를 보지못하고 상대방을 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용서하는 부분에서 연약한 자신을 본다면 문제는 쉽게 풀어갈수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너무나 많이 내면의 상처를 안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부모님으로부터, 가족으로부터, 때로는 교회안에서 성도들 때문에 상처를 받고 떠나신분들이 많습니다,
예수님은 떠난사람을 내가 용서하기를 바라십니다. 나는 할수 없지만 성령께서 용서할수 있도록 나를도우실 때 우리는 용서할수 있습니다. 긍휼은 용서를 통해 이루어지는것입니다. 자비와 불쌍히 여기는것도 마찬가지입니다. 모든 대안관계속에서 우리가 해결해 가야하는 것은 하나님의 사랑이 나를 변화시킨다는 것을 반드시 믿어야 합니다.
누가 용서할수 있습니까? 누가 긍휼히 여길수 있습니까? 누가 불상히 여길수 있습니까? 하나님의 사랑으로 가득찬 사람입니다.
긍휼히 여김을 받는 것은 긍홀의 근원이신 하나님으로부터 긍홀히 여김을 받는다는 말씀입니다. 우리는 사랑할수 있습니다. 우리는 긍휼한 마음을 가질수 있습니다. 우리는 그 사람을 불쌍히 여길수 있습니다. 문제는 하나님의 사랑이 식어지지 않도록 해야하는데 있습니다.
사랑이 식어지게 되면 우리는 다시 그 사람을 올무에 집어넣고 자신안에 있는 죄를 보지못하고 다른 사람의 죄를 더 크게 볼수 있다는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하면 긍휼을 베풀수 있습니까?
예수님은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이 긍휼의 사람, 자비의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타락한 이후 우리 인간의 본성은 악에 물들어 있습니다. 잔인함과 무자비가 우리의 본성이 되었습니다. 우리는 변화된것처럼 보이는데 변화가 일어나지 않고, 세상 사람들 가운데 한 사람처럼 살아갈때가 있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긍휼을 베풀수 있습니까? 라는 질문을 합니다.
1. 끊임없는 말씀의 다스림과 기도로 나를 무릎끊게 하라.
마5:44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48 그러므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
우리는 날마다 하나님의 말씀이 나를 쳐서 무릎을 끊게 해야합니다. 불쑥불쑥 올라오는 내 나쁜 감정을 죽이는 것은 말씀을 다스림과 기도로 무릎을끊을때입니다. 만약 말씀에 다스림을 받지않고 기도하지않는다면 지금 우리는 내 방식대로 살아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럴때는 절대로 긍휼한 마음이 들수 없습니다. 긍휼은 내 힘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말씀이 나를 다스릴때입니다.
그래서 내가 할수 없기 때문에 기도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도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박해하는자를 위하여 기도하라고 말씀하신것입니다. 그리고 온전한자가 되는 자리까지 서가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대인 관계속에서 어려움이 있으신분이 있습니까? 이말씀대로 하세요순종하시고 한번해보세요. 당신을 박해하는자를 위해 눈물로 기도해보세요. 성령의 조명이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용서하실수 있을것입니다.
2. 상대방이 아닌 내가 사랑할수 있게 해달라고 성령께 도움을 청하라
요한일서 4: 10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속하기 위하여 화목제물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라
11 사랑하는 자들아 하나님이 이같이 우리를 사랑하셨은즉 우리도 서로 사랑하는 것이 마땅하도다
하나님은 사랑이십니다. 하나님의 그 사랑이 우리의 죄와 저주를 끊기 위해서 화목제물이 되셨습니다. 이것보다 더 큰 사랑은 없습니다. 그런데 그 끈임없는 얘수그리스도의 사랑이 지금 우리에게 부어짐바가 되었습니다. 자신의 연약함과 부족함을 먼저 볼수 있어야 합니다. 긍휼하심의 근원적 뿌리는 예수그리스도에게 있습니다. 미움도 시기도 질투도 살인도 원수도 나와 다른 행위나 모습을 하고 있는 상대방에서 보는 것이 아니라, 내 자신의 마음의 자아를 볼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내면의 상처가 있는 사람들입니다 이 죄의 쓴뿌리가 나를 발목잡고 있습니다.
그래서 사랑할수 없고, 긍휼히 여길수 없는 것입니다.
그것은 내가 아직 하나님의 사랑으로 가득차 있지 않다는 것을 알고 하나님의 사랑으로 가득차게 해달라고 그리고 그 사랑이 다른 사람들에게 드러나도록 성령께 도움을 매일 청해야 하는것입니다.
그들이 배부를것임이요
누가 배부를수 있습니까? 긍휼히 여기는 자입니다. 긍휼의 근원이신 하나님으로 우리는 긍휼을 받습니다. 사랑하는 성도님! 여러분의 힘으로는 긍휼히 여길수 없을 것입니다. 불쌍히 여기는 마음도 없을 것입니다. 이것이 인간의 본성에서 나오는 죄의 모습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나를 위해 십자가의 죽으심을 생각한다면 우리를 용기를 얻을수 있고 용서할수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사랑은 나라는 존재의 저주를 끊으셨고, 흑암에서 발버둥을 치고 고통가운데 있어야 나를 건지시기 위해 예수님께서 긍휼한 마음으로 나를 위해 십자가에 죽으셨습니다. 사랑하는 성도님! 샘물교회안에 긍휼히 강같이 흘러가기를 원합니다.
인애와 자비가 강같이 흘러가기를 원합니다. 다른지체를 불쌍히 여기는 마음을 갖기를 원합니다
그리하여 온전함에 이르는 샘물교회 성도님들이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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