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1.31.
채인기 목사
성경본문 : 누가복음 10:38-42
제목: 마르다의 세상에서 마리아의 신앙갖기
우린 닉 부이치치이라는 사람을 보면서 두다리 두팔이 없는 상태에서도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그는 왕따로 인한 자살의 충동, 버림받음 성장하면서 주어진 따가운 시선들 통해 살아온 인생이 얼마나 힘들어겠습니까? 그러나 자신이 장애를 가진 연약한 몸인데도 불구하고 전세계를 단니면서 예수그리스도의 복음을 증거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닉 부이치치에게서 전하게 하신 것은 이런 몸에서도 사람들은 불행이라고 생각하고 슬퍼하고 낙심하고 좌절하지만 자신의 몸을 통해 오히려 하나님을 찬양하며 영광을 돌리면서 모든 사람들에게 희망을 주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님! 닉부이치치는 육신은 비롯 장애이지만 생각하는 정신만큼 지극히 정상이고 아름답습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육신은 정상인데 생각하는 정신이 장애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렇습니다. 자신에게 없는것 때문에 불평.불만하기 때문입니다.
공평하신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이 모양 저모양으로 만드신 이유는 여러분이 가지고 있는 정신적, 육체적 건강을 통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고 이땅에서 살아가게 하신것입니다. 없는것에서 불평할것이 아니라, 여러분에 있는 것이 다른사람에게는 없는것있습니다. 자신이 가지고 장점을 가지고 감사하시길 바랍니다. 공평하신 하나님은 지금도 우리와 역사하십니다.
어느덧 2022년 1월달이 지나갑니다. 본문을 묵상하면서 오늘 많은 기독교인들의 삶은 마르다와 마리아의 삶과 크게 다르지 않다는것입니다. 마리아처럼 주님의 발앞에 앉아있기를 간절히 원하지만 쉴새없이 밀려드는 우리네 일상사는 그러한 여유를 허락하지 않습니다. 정신없이 흘러가는 바쁜일상속에서, 여러분에게 찾아오신 예수님께서는 오늘 마르다와 마리아의 모습을통해 우리에게 말씀으로 창을 들어볼수 있도록 허락하셨습니다
본문설명
본문에 마르다와 마리아 이야기와 바로 앞에 선한사마리아인의 비유를 통해 저자 누가는 같은 선상에서 바라보게 합니다.
선한사마리아의 비유(눅10:30-37) 어떤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여리고가는중에 강도를 만났습니다. 강도들이 옷을 벗기 때려 거의 죽어가게되어 버렸습니다. 이때 첫 번째 사람 제사장이 지나갔는데 강도만나 사람을 도와주지 않고 못본채하고 지나갑니다. 두 번째 레위인도 못본채 지나가버립니다. 마지막 세 번째 이방인 사마라인이 불쌍히여겨 주막으로 데려가서 돌보게 하고 비용이 더 들면 자신이 돌아올 때 값을 치르게 해주겠다고 말했습니다.
이때 예수님께서 누가 강도만난자의 이웃이 되겠느냐고 유도합니다. 이때 율법사가 자비를 베푼사람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면서 예수님께서 너희들도 그와 같이 하라고 말씀합니다. 즉 선한사마리아 비유는 중심주제는 누가 진정한 이웃인가? 이웃을 사랑하라는 모델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반면 바로 이어 예수님께서는 마르다와 마리아의 말씀을 통해 보여주고자하는 가장 중심주제는 하나님의 사랑과 생명의 양식은 오직 예수님뿐임을 전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마르다와 마리아가 사는 동네는 예루살렘의 근처에 베다니라는곳입니다. 예수님은 마르다집에 도착했으며 마르다는 예수님을 자기집으로 영접했습니다.(10:38)
왜! 마르다는 예수님을 자신의 집으로 환영하며 모셨을까? 예수님은 마르다의 가족을알고 계셨습니다. (요11:1-44)
동생 마리아는 예수의 몸에 향유를 부은 장본인입니다. (요12:1-8) 또한 마르다의 오라버니인 나사로가 죽었을 때 예수님께서 살려주셨습니다. 이 가족은 예수님을 너무나 사랑했습니다. 이 가족은 모두 예수님과 깊과 특별한 사랑과 은총을 받고있었습니다.
마르다는 예수님같은 중요한 분이 자신의 집으로 초대하므로써 준비하는 일이 많았습니다. 대접하는 일로 마르다는 마음이 굉장히 분주했습니다. 그러나 동생 마리아는 주님의 발앞에 앉아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있었습니다.
두 자매간에 갈등속에서 예수님께서는 무엇을 말씀하시는지 의미를 깨닫고 오늘 우리의 모습을 투영해보는것입니다
마르다 : 자신의 일로 분주함
40 마르다는 준비하는 일이 많아 마음이 분주한지라 예수께 나아와 이르되 주여 내 동생이 나 혼자 일하게 두는 것을 생각하지 아니하시나이까 그를 명하사 나를 도와 주라 하소서
41 주께서 대답하되 이르시되 마르다야 마르다야 네가 많은 일로 염려하고 근심하나
여러분 이 말씀에서 마르다의 어떤 모습이 상상이 되십니까? 언니인 마르다는 지금 예수님을 초청한후 일이 많아 혼자 준비하느라 마음이 분주했습니다. 그리고 이 일을 혼자하고 일하고 있다는 생각에 불평과 약간의 원망이 섞여있습니다 그러면서 불평과 원망을 지금 예수님께 토로하고 있는 모습이 보입니다.
우리 일상생활의 방식에서 잘못된 습관 :
1.분주함에서 오는 것 원망과 염려와 근심
마르다는 준비하는 일이많아 마음이 분주했습니다 그러면서 예수님께 와서 내동생이 나혼자 일하게두는 것을 생각하지 마시고 나를 도와주라고 말씀해주세요. 라고 마르다가 예수님께 요청하고 있습니다.
여기에는 보이지않는 내면의 2가지 원망이 섞여있습니다. 첫 번째는 몸시 바쁜 와중에도 자신을 돕지않는 마리아에 대한 책망을 해주라는 의미가 있고 둘째는 이 사실을 알고도 침묵하시는 예수님께 대한 원망이 있습니다.
분주함이라 헬/ 페리스파오) 마음이 어수선하다, 아주 바쁘다.라는 뜻입니다.
마르다는 예수님을 초청하였지만 자신의 일에 분주합니다. 어쩌면 예수님이 요구하시지 않는 일을 혼자하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자신의 일로 평강의 예수님이 계시는데도 마르다라는 자기의 일에 심취하느라 염려와 근심에 쌓여 있습니다. 이러한 마르다에게 예수님은 분주함으로 오는 염려와 근심을 책망하십니다.
분주한 나머지 정신이 흐트러져지다보면 사람들은 이내 낙심하기 마련입니다. 삶의 무게에 과도하게 짓눌리다 보면 피곤함이 슬금슬금 찾아듭니다. 염려와 근심은 삶의 균형있는 시각과 방어 능력을 망가뜨리는 주요 원인이 됩니다.
예수님은 이런 행위를 원하지 않습니다. 마르다는 예수님께 가장 최고의 것을 드리고 싶은 마음뿐이었을것입니다. 초대된 예수님을 위해 상다리가 휠정도록 맛있는 음식으로 대접할려는 생각으로 마음이 바빴습니다. 이미 자신의 생각속에서 무엇을 할것인지 다 생각을 해놓았을것입니다 아마 마르다는 이렇게 준비하면 예수님을 조금이나마 은혜를 값을것고 칭찬을 받을것이라는 생각했을지 모릅니다.
오늘날 신자들이 주일예배드리는 한시간을 참지못하여 마음이 분주해서 힘들어합니다. 분주한 마음은 예배에 형식에 치우쳐 예배가 끝나자마자 산으로 들로 바다로 향하여 쉼을 얻을려고 합니다. 이것은 하나님과의 친밀한 관계를 방해하는 요소입니다. 그래서 여러분의 인생의 시간에 영적인 시간을 따로 떼어놓으셔야 합니다. 기도의 시간, 말씀을 묵상하는 시간이 여러분의 인생을 유익을 반드시 줍니다
2.인간인 방법은 결국 어려운 결과를 가져옵니다.
오늘 큐티묵상중 아브라함과 사래사이에 대를 이를 자손이 없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람에게 사라에게서 낳은 후손이 네 상속자이고 민족을 이룰것임을 약속하셨습니다. 그러나 사래는 인간적인 방법으로 자신의 종 애굽여인은 하갈에게서 아브라함과 동침하게 하여 자식을 낳게되는 그 자녀 이름이 이스마엘입니다. 이스마엘이 오늘날 아랍계 족속입니다. 북아프리카,시리아,중동, 서아시아에 분포되어삽니다. 성경은 이스마엘이 장차 어떤 민족이 될것인지를 말씀합니다.
창16:11 여호와의 사자가 또 그에게 이르되 네가 임신하였은즉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이스마엘이라 하라 이는 여호와께서 네 고통을 들으셨음이니라
12그가 사람 중에 들나귀 같이 되리니 그의 손이 모든 사람을 치겠고 모든 사람의 손이 그를 칠지며 그가 모든 형제와 대항해서 살리라 하니라
하갈에서 낳은 아들 이스마엘은 들나귀라고 표현합니다. 들나귀는 바로 매우거칠고, 낙폭한자에 대한 상징적표현입니다. 이들은 그의 손이 모든 사람을 치겠고, 모든 형제와 대항해서 살리라 고 말합니다. 이스마엘 후손들이 끝임없이 이웃과 동족 그리고 많은 사람들을 메우거칠고 난폭하게 하는 족속이 될것임을 예언하고 있습니다.
오늘날 아브라함의 여종 하갈의 후손인 이스마엘의 후예가 이슬람 종교의 기원이요 / 아브라함의 본처 사라의 후예인 이삭에서 유대 기독교가 시작되었습니다. 결국 아브라함 후손들 간의 다툼이며 나아가 종교로 제도화되면서 사실상 이름만 다를 뿐 하나의 실체인 이슬람의 ‘알라’와 ‘여호와의 이름’으로 무차별 살상을 자행하고 있는 것이다.
더 나아가 두 종단의 생명이 담긴 성지를 빼앗길 수 없는 것이 그들의 절대신앙인 것이다.
15년전 미국 뉴욕에 있는 세계 무역센타에 대한 이슬람 계열의 비행기 자살테러 공격한 것 기억하십니까?
tv에서 팔레스타인 폭탄자살자들은 대개 소위 이슬람 과격단체인 하마스나 지하드 소속 단원들입니다. 유대인중 기독교인들을 빨간옷을 입고 참수시킨 장면을 보았을것입니다. 이들이 다 이스마엘족속인 사우디, 이라크, 이란등 나라입니다. 더군다나 자살폭탄에 나서는 사람들은 철저하게 알라의 이름으로 이스라엘 즉 사라의 후손을 죽이는 것이 절대신앙이 된것입니다. / 4000년이 지난후 오늘날에도 이들은 앙심을 품고 이스라엘을 죽일려고 여전히 싸우고 있습니다.
무섭지 않습니까? 인간적인 방법이 인류의 역사의 얼마나 처참한 결과를 낳게 되는지를 말입니다.
마르다는 예수님이 원하시는 방법보다는 인간적인 방법으로 예수님을 최선을 다해 섬길려고 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님! 하나님의 뜻인 말씀에 순종할때에 우린 생명의 길, 행복의 길, 기도의 응답이 넘치는 삶을 누리게 됩니다. / 저는 저희 교회안에서도 날마다 큐티를 통해 하나님을 만나고 삶의 통치를 받고 있는 분이 있음을 압니다
예수님의 말씀이 여러분의 마음에 포근하게 자리를 잡을 때 진정한 쉼과 안식을누리게 될것입니다.
마르다의 방향을 올바르게 가르치시는 예수님 : 생명 양식인 말씀을 구하라
마르다는 자신의 손님인 예수님에게 호소하면서 동생 마리아에게 자기언니를 돕게 해달라고 청합니다.
인간적으로 볼때에 마르다처럼 아주 귀한분이 집에 초대대면 음식을 준비하고 여러 가지로 준비할것이 많기 때문에 일손이 필요하고 함께 도와주는 것이 당연합니다. 그녀는 육체적인 배고픔을 해소해 줄 빵보다는 영혼을 채워주는 생명양식인 하나님의 말씀이 훨씬 더 귀하고 가치가있음을 미쳐 깨닫지 못했던것입니다.
42절 몇가지만 하든지 좋은 한가지만이라도 족하니라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시고자 42절 말씀을 원어적으로 풀어봅니다
42절 그러나 몇가지만 하든지 좋은 한가지만이라도 족하니라 : 예수님께서 이말씀을 하시는 의미는 ‘실상 필요한 것은 한 가지 뿐이다’ 라는 말씀입니다. 마르다의 일도 중요하지만 더중요한것은 마리아가 선택하여 내 발앞에서 말씀을 듣는 것이 더 중요성하다는 것을 분명하게 드러내고 있습니다. 당시 마르다가 하였던 음식을 준비하는 일도
매우 가치있는 일입니다
1. 예수님의 중요한 핵심 요점은 . 마르다야! 너에게 필요한 것은 단 한가지가 있다 그것은 나에게 육체의 필요를
채워주는 빵한조각을 준비하여 주는것보다, 더 값지고 가치있는 것은 나에게서 나오는 생명 양식인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이 생명을 살리는것임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우리의 머리와 가슴이 생활가운데서 적용된 삶을 살도록 유익이 되는 4가지 말씀?
바울은 딤후3:!6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라고 말합니다. 사람은 누구나 잘살고 싶어합니다. 어떻게 하면 잘살수있을까요? 먼저는 우리의 지혜가 필요합니다. 그리고 성경의 말씀교육을 알고 순종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에게 주는 유익 4가지: . 1.교훈 : 교훈은 무엇이 바른 길인지를 알려주는 하나님의 가르침입니다. 여러분의 삶에서 옳고 그름을 측량할수 있는 방법은 오직 성경의 말씀의 기준을 설정해야 합니다.
2.책망: 책망은 교훈에 따라 살지않을 때 그 길이 잘못되었음을 알려주고 꾸짖는 하나님의 가르침입니다.
3.바르게 함 : 바르게함은 책망을 맏았음에도 돌이키지 않을 때 억지로 바른길을 가도록 이끄시는 하나님의 인도하심입니다.
4.의로 교육: 의로 교육은 옳은길로 가도록 이끄시는 하나님의 가르침입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분명한 삶의 유익을 주십니다. 옳은길, 바른길로 갈수 있도록 인도하시고, 잘못된 길을 갈때에 하나님께서 책망도 하십니다.
그렇다면 성경을 배운 사람중에는 어떤 사람이 있을까요?
딤후3:7 항상 배우나 끝내 진리의 지식에 이를 수 없느니라
성경을 배우나 끝까지 진리의 지식에 이르지 못한 사람들이 있을수 있다는 것입니다. 배우기는 하나 전혀 깨닫지못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진리의 지식에 이르지 못하는 이유 무엇입니까?
딤후3:14 그러나 너는 배우고 확신한 일에 거하라 너는 네가 누구에게서 배운 것을 알며
배우는 것으로 안됩니다. 배우는것으로만 끝나면 안됩니다. 배웠으면 그것을 확신해야 하고, 확신했다면 그 확신위에 살아내야 합니다. 말씀이 내안에서 확신할 때 삶을 여러분의 삶에서 유익이 되는것입니다.
마리아 : 1. 생명의 말씀을 사모함 2. 예수님과의 사랑의 관계
마리아는 예수님과 생명의 말씀을 사모함과 함께 친밀한 사랑의 관계를 유지하는 것을 봅니다.
39 그에게 마리아라 하는 동생이 있어 주의 발치에 앉아 그의 말씀을 듣더니
우린 인간적인 볼때에 얄미울수 있을것같습니다. 언니를 조금만 도와주면 되지 도와주지 않았다고 마리아를 나무라할수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마리아에 행동에 책망보다 좋은 편을 택하였고, 빼앗기지 아니할것이라고 말씀합니다.
42절 마리아는 이 좋은 편을 택하였으니 빼앗기지 아니하리라 : 본절은 마리아로 하여금 자기를 도와주도록 명하여 달라는 마르다의 요청이 거부되고 오히려 마르다가 마리아의 태도를 따라야 한다는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지금 자신의 발앞에 앉아 말씀을 경청하고 있는 마리아의 행동은 같이 도와달라고 청하는 언니 마르다의 음식 준비보다 더 차원 높은 하나님 사랑의 표현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세상의 분주함이나 세상의 열심히 예수님을 사랑하는 행위에 방해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좋은 편”은 바로 하나님에 대한 순수한 사랑이며, 이러한 사랑은 말씀을 사모하는 것으로 구체화됨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2. 예수님의 가장 중요한 핵심 요점은 “예수님과의 관계에서 단순한 형식들 (주님에게 저녁을 대접하는 것, 사회적 환경속에서 주님을 만나는 것같은)이 생생하고 인격적인 관계 즉 하나님과의 사랑의 관계가 최우선이 되어야하는데 세상의 분주함이 절대적이 되어서는 절대 안된다는 것입니다.”
일단 마리아는 자기 소속이 분명한 신앙관을 가졌음을 봅니다. 언니를 도우는 일과 예수님의 말씀을 듣는사이에서 마리아는 가장 최선의것을 선택했다는 것입니다. 잠깐의 망설임도 있었겠지만 그러나 그는 예수님을 자신의 집으로 초대할때에 그분의 말씀을 듣는 것을 더 좋아했기 때문에 주님의 발치에 앉아 말씀을 듣는 것을 택했다는것입니다.
머뭇머뭇거리는 신앙을 갖지말라
열왕기상18장에 바알신과 아세라신을 를 섬기는 선지자들 850명과 하나님의 선지자 엘리야가 갈멜산에서 대결을 합니다.
엘리야는 바알의 신이 위대한지 아니면 전능하신 하나님이 더 위대한지를 반드시 결판을 내야했기에 갈멜산으로 모이게 합니다.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은 바알이라는 우상을 섬겼습니다. 이 말씀을 통해 이땅에서 살아가는 신자들에게 세상도 좋아하는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하나님을 사랑하는것도 아닌 중간에 낀 신앙을 가진 신자들이 있습니다. 자기가 믿는 신 하나님이 어떤분인시지를 망각하고 살아가는 이 세대에 우리에게 분명한 답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왕상 18장에 세부류의 사람들이있습니다. 첫 번째 그룹 아합왕과 바알의 선지자 450명 아세라의 선지자 400명있
고 / 두 번째 사람. 하나님의 선지자 엘리야 한사람이 있습니다. / 세 번째 그룹. 그 중간에 바알도 섬기고, 하나님도 섬기면서 머뭇머뭇거리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있습니다. 먼저 엘리야는 세 번째 그룹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하여 말씀합니다.
18:21 엘리야가 모든 백성에게 가까이 나아가 이르되 너희가 어느 때까지 둘 사이에서 머뭇머뭇 하려느냐 여호와가 만일 하나님이면 그를 따르고 바알이 만일 하나님이면 그를 따를지니라 하니 백성이 말 한마디도 대답하지 아니하는지라
이스라엘 백성들아 너희가 어느때까지 둘사이에서 머뭇머뭇거리고 있느냐 하나님이 진짜 신이면 하나님을 따르고 바알이 진짜 신이면 바알신을 따르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백성들이 양심상 한마디도 대답하지 못합니다.
머뭇거린다 : 절뚝거리다. 뒤뚱거리다 의미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바알이라는 우상을 섬겼습니다. 오늘날의 우상은 바알신뿐만아닙니다. 미국의 팀 켈러 목사님 저서중에 “내가 만든신”이라는 책입니다. 그중에 우리가 섬기는 우상은 사랑, 돈, 성취, 권력, 문화, 평생소원도 우상이 될수 있다는 것입니다. 자신이 만든신이다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자기가 만든신은 반드시 배신한다는 것입니다.
엘리야는 먼저 제안을 합니다. 송아지 둘을 택하여 바알선지자 한 마리를 선택하여 각을 떠서 나무위에 놓고 불은 붙이지 말자, 그리고 엘리야역시 나머지 한 마리를 가지고 각을 떠서 똑같이 불을 붙이지 않는것으로하여
불로 응답하는신이 그가 하나님이라고 말합니다.
24 너희는 너희 신의 이름을 부르라 나는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리니 이에 불로 응답하는 신 그가 하나님이니라 백성이 다 대답하되 그 말이 옳도다 하니라
바알 제사장들은 밤새도록 바알신을 외치지만 응답이 없습니다.
26 그들이 받은 송아지를 가져다가 잡고 아침부터 낮까지 바알의 이름을 불러 이르되 바알이여 우리에게 응답하소서 하나 아무 소리도 없고 아무 응답하는 자도 없으므로 그들이 그 쌓은 제단 주위에서 뛰놀더라
대답하지 않는 신이 바알신이 우상입니다. 응답하지 않는신을 어리석게 믿고있는 백성들이 하나님의 백성들입니다. 얼마나 어리석습니까? 이제는 엘리야의 이 상황에 가장 위대한 이름을 부르면서 자신이 믿는 신이 어떤 분인신지를 바알, 아세라 선지자들, 이스라엘 백성들, 아합왕들 앞에서 보여줍니다.
37 여호와여 내게 응답하옵소서 내게 응답하옵소서 이 백성에게 주 여호와는 하나님이신 것과 주는 그들의 마음을 되돌이키심을 알게 하옵소서 하매
38이에 여호와의 불이 내려서 번제물과 나무와 돌과 흙을 태우고 또 도랑의 물을 핥은지라
하나님의 능력을 선보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엘리야의 부르짖음에 응답하십니다. 모든 것을 불로 다 태워버립니다.
여러분은 이제 보여주셔야 합니다.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만방에 모든 사람들에게 보여주셔야 합니다.
여러분이 믿고 신이 누구인지를 보여주어야할 막중한 책임이있습니다. 하나님이 하신 일은 항상 옳습니다. 그분이 하신일은 최선이고 최고입니다. 절대로 후회가 없으십니다.
오늘 우리가 보아야 하는 것은 마리아의 신앙입니다. 그는 머뭇거리지 않았습니다. 그는 최선의 것을 선택했습니다.
마리아는 예수님의 발자치에 앉아서 말씀을 듣고 있습니다.
하루하루 삶에서 말씀앞에 설려고 하지만 분주한일들이 나를 사로잡고 있으면서 말씀앞에 서지 못하게 할것입니다.
따로 주님과의 시간을 반드시 가져야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영적인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영적인 공급을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속에서 계속 유지해야 합니다.
마르다의 신앙은 시각과 목표와 가치관의 차이가 분명합니다
첫째. 마르다는 주님발치에 앉아 말씀을 들었다는 것은 세상을 다르게 본다는 것입니다. 무엇이 가치있고 무엇이 가치없는지를 정확히 보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비싼 옥합을 깨트려 예수님의 머리에 부은 것을 보면서 말입니다.
마리아는 썩어질것에 미련을 갖지 않는 신앙을 가졌습니다. 그는 하나님께 가치를 둔 삶을 살았습니다.
둘째. 마리아는 세상사람들과 다른 삶의 계획과 목표를 가지고 삽니다.
마리아는 분주한 많은 일보다 세상것을 섞을려고 하지않습니다. 그 인생의 계획도 목표속에도 예수님으로만 가득차 있습니다. 우리역시 삶의 계획과 목표도 또 공부할때에도 직장생활을 할때에도 사업을 할때에도 예수님이 기뻐하시는 것을 목표로 합니다. 자녀를 기를때에도 세상의 논리나 가치가 아니라, 주님의 자녀로 기르고 싶어한다는것입니다. 저는 우리 성도들의 기도제목을 보면서 자녀를 놓고 기도할때에 하나같이 자녀들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자녀가 되었으면 하는 바램으로 기도제목을 올려놓았습니다.
예수님께서 간절히 원하시는 마음은 무엇일까? 주님과의 친밀한 교제
42절 몇가지만 하든지 좋은 한가지만이라도 족하니라 마리아는 이 좋은 편을 택하였으니 빼앗기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
‘실상 필요한 것은 한 가지 뿐이다’ 라는 말씀입니다. 마르다의 일도 중요하지만 더중요한것은 마리아가 선택하여 내 발앞에서 말씀을 듣는 것이 더 중요성하다는 것을 분명하게 드러내고 있습니다. 즉 주님과의 친밀한 교제를 원하고 계십니다.
영상에서 보았던것처럼 닉부이치치는 젊어서는 하나님의 계획을 몰랐습니다. 자신의 몸으로는 어떤것도 할수없다는 것을 말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세계를 다니면서 복음을 전하는자로 쓰시고, 가정을 꾸려 사랑하는 아내와 자식도 주셨습니다. 사랑하는 성도님! 자신의 연약함을 가지고 불평하거나 불만을 갖지마세요. 약함을 오히려 강점으로 바꿀려고 노력해 보시길 바랍니다. 예수님께서는 팔다리가 없는 저 몸으로 닉부이치치를 쓰신다면 분명히 저와 여러분도 쓰실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여려분이 반드시 예수님이 어떤분인신지를 발견해야 합니다.
그때 여러분의 계획과 목적이 분명하게 뚜렷하게 보일것입니다
설명절입니다. 어떤 사람에게는 분주한 날이될수있겠고 또 어떤 사람에게는 차분하게 주님과의 교제를 할려는 사람들도 있을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님! 세상의 분주함이나 세상의 열심히 예수님을 사랑하는 행위에 방해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또하나는 육체의 필요를 채워주는 빵한 조각을 준비하여 주는 것 보다, 더 값지고 가치있는 것은 주님에게서 나오는 생명 양식인 하나님의 말씀을 듣기를 갈망하는 친밀한 교제를 주님을 원하고 계심을 잊지마시고
설연휴기간 그리고 그 한주간 주님과의 사랑의 관계를 계속 갖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