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2.13.
채인기 목사
성경본문 : 마태복음 7장 13-14절
제목 : 좁은문으로 들어가고 힘쓰라
메리 스티븐슨의 “ 모래 위의 발자국” 이란 시를 소개합니다.
어느날 나는 한꿈을 꾸었다.
내가 내 주님과 함께 해변을 걷고 있을 때 / 나의 지난간 삶이 어두운 하늘을 가로질러 영상으로 비쳤다. /
장면마다 모래위에 발자국이 두 세트로 보였다. / 하나는 나의 발자국 . 다른 하나는 주님의 발자국 /
내 인생의 마지막 장면이 내 앞을 비취고 지나갔을 때 / 모래위의 발자국을 뒤돌아보았다. /
내 삶의 여정에서 여러번 나는 보았다. / 특별히 가장 힘들고 슬플때에 발자국이 한 세트뿐이었다는 것을 /
나는 너무 괴로워서 주님께 여쭈어 보았다. / “주님, 내가 주님을 따르기로 결심한 후에
주님께서 늘 나와 함께 걸으시겠다고 말씀하시지 않았습니까? / 그런데 내 인생의 가장 슬프고 힘든때에
발자국이 한 세트밖에 안 보였습니다. / 왜 그런지 모르겠습니다. / 가장 필요할 때 주님이 저를 버려두셨습니다
주님께서 이렇게 속삭이셨다. / 나의 보배로운 자녀야. 나는 너를 사랑하고 / 너를 결코 버리지 않을 것이다.
모든 시련과 시험중 결코, 결코 안버릴 것이다. / 네가 발자국 한세트만 본 것은 내가 너를 업고 걸었기 때문이다.
이 시는 어떤 사람이 살아가기가 너무나 고달파서 몹시 지쳤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하소연이라도 할까 해서 성전에 나갔습니다. 가서 혼자서 기도하면서 실컷 울었습니다. 서럽고 외롭고 고달파서 자기 설움에 복받쳐 실컷 울어 버린 것입니다. 그러다 지쳐서 깜빡 잠이 들었습니다. 성전에서 그는 꿈을 꾸었습니다.
바닷가에 아름다운 모래사장이 있고, 뒤를 돌아보는데 지금 자기가 걷고 있는 발자욱이 선명하게 찍혀있는 겁니다. 그런데 멀리보니 자기만이 아닌 옆의 누군가의 발자욱이 나란히 찍혀 있습니다.
그런데 알고 보니까 또 한사람의 발자욱은 다른 사람이 아닌 주님의 발자욱이었습니다. 주님께서 자기와 함께 나란히 걸어주신 것입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두사람의 발자욱이 군데 군데 하나가 지워져 있었습니다. 생각해보니 사라지지 않고 계속 남아있는 그 발자욱은 자기의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옆의 주님의 발자욱이 사라졌던 때를 가만히 생각해 보니까. 자기가 가장 힘들었던 때였습니다. 그래서 이 사람은 주님께 섭섭해서 질문을 드렸습니다. “주님! 내가 가장 힘들어 어느 때보다도 더 주님이 필요했을 때 주님은 나를 떠나 어디에 계셨습니까?” 그때 주님의 대답이 들려왔습니다. “사랑하는 내 아들아! 난 그때 너를 업고 걸었단다.”
우리는 때로 이런 생각을 합니다. “내가 몹시 낙심되고 피곤해 있을 때, 정신적으로, 육체적으로, 지치고, 실패하여 눈앞에 암담한 현실이 직면해 있을 때 그때 주님이 오셔서 내 손을 꼭 잡아 주신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렇다면 얼마나 힘이 될까?” 그런데 우리는 여기서 하나를 더 생각할 줄알아야 합니다. // 날마다 주님이 나를 업고 가신다는 것을 말입니다.
오늘부터 남성사역훈련이 시작하게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갈릴리에서 12명의 제자들을 세우셨습니다. 이 제자들의 사명은 단하나 예루살렘과 온유대와 사마리아 땅끝까지 복음을 증거하는 사역을 감당하는 것이었습니다.
복음을 증거하는 제자를 부르셨습니다. 남성훈련생들이 참된제자로 거듭나기를 기도부탁합니다.
본문설명
13.14절은 ‘넓은 길’ 과 ‘좁은 길’ / 15-20절은 ‘좋은 나무’ 와 ‘못된 나무’ /,21-23절은 ‘참된 제자’ 와 ‘거짓선지자’
/ 24-27절은 ‘지혜로운 건축자’ 와 ‘어리석은 건축자’ 가 서로 비교되고 있습니다.다. 즉 이 부분에는 예수
의 말씀에 대하여 현실적으로 나타날 수 있는 두 가지 상반된 반응을 각각 기록하여 어떤자가 그리스도의 제자로
서 합당한 삶인지를 밝히면서 바른 선택과 더불어 실천적 신앙을 촉구하고 있다는 것이다.
두종류의 길 : 넓은문과 좁은문 좁은 길과 넓은 길
성경은 두 부류의 사람들, 곧 좁은문으로 들어가는 자와 넓은 문으로 들어가는 자가 있다고 말씀합니다. 그렇다면 누가 좁은 문으로 들어가는 자이며 누가 넓은 문으로 들어가는 자입니까?
오늘날 교회안에서도 두 부류의 성도가 있습니다. 두 부류 모두 신앙인의 모습을 합니다. 똑같이 교회안에서 성도로써 신앙생활을 하지만 결국은 들어가는 문은 다르다는 것입니다.
좁은 문, 좁은 길을 들어갈려는 사람은 구원을 받는 필수불가결한 요소인 예수그리스도의 피를 힘입어 담대하게 들어가 영원한 생명을 얻는가 하면, / 다른 한쪽 넓은 문, 넓은 길을 선택한 신자는 언뜻보기에 구원을 받은것처럼 보이지만 구원을 얻지 못하고 영원한 멸망에 이를수 있는 멸망의 문에 서게 될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린 좁은문으로 들어가는 신자와 넓은 문으로 들어가는 신자가 영적으로 어떻게 다른지를 바로 알 필요
가 있습니다.
1.넓은 문으로 들어가는 자
고전 3:1.2 1형제들아 내가 신령한 자들을 대함과 같이 너희에게 말할 수 없어서 육신에 속한 자 곧 그리스도 안에서 어린 아이들을 대함과 같이 하노라
2내가 너희를 젖으로 먹이고 밥으로 아니하였노니 이는 너희가 감당하지 못하였음이거니와 지금도 못하리라
교회안에 신자중 넓은문으로 들어가는 자는 영적으로 보면 아직도 육신에 속한자입니다. 그들은 그리스도안에 있지만 어린 유아상태임을 볼 수 있습니다.
정상적인 성장과정을 거치지않고 영적인 질병 때문에 비정상적으로 성장한 아이입니다. 이들은 하나님이 그들을 아무리 사랑하실지라도 이들은 결코 하나님의 사랑을 느끼지못할것이며, 이런 저런 섬김에 봉사하지만 감사와 보람을 느끼지못합니다. 넓은문으로 들어가는 자는 죄에 대한 반복되는 실패가운데 사는 자입니다. 육적인 그리스도인으로써 하나님의 은혜가 전혀 없는 것은 아니지만, 종종 눈물을 흘리며 회개하지만 .죄에 대하여 무감각하고 이기는 경험이 거의 없기 때문에 죄와 싸워 이겨야겠다는 결의도 없고 부족합니다.
넓은 문으로 들어간 사람은 인격적인 주님과의 지속적인 사귐이 없습니다. 이들은 교회안에서 집사나 권사나 장로로써 직분이나 봉사의 문화는 익숙하지만 어디까지나 주님과의 깊은만남이 없는 신앙생활을 하다보니 교회안에서 거룩함을 배제한채 세상적인 문화로 판단하고 거기에 세상문화를 심을려고 합니다.
넓은문을 들어가는 자는 교회를 단니는 것과 예수님을 믿는것을 종교생활에 하나로 생각하며 모든 종교중 하나로 생각하고 문화활동중 하나로 여긴다는 것입니다. 또한 넓은 문으로 들어간사람은 신령한 것을 받지못한 사람이고
복음에 대한 감격을 없는 사람입니다.
그렇다면 넓은문으로 들어가는 자들은 누구입니까?
첫째. 신령한 것들을 받지못한 육에 속한사람
고전 3:1 형제들아 내가 신령한 자들을 대함과 같이 너희에게 말할 수 없어서 육신에 속한 자 곧 그리스도 안에서 어린 아이들을 대함과 같이 하노라
※ 신령한자 (호 프뉴마티코스) 성령을 마음에모시고, 성령에 인도를 따라 순종하는 자입니다. 그런데 넓은문으로 들어간 사람은 신령한 것을 받지못한 육에 속한 사람입니다.
육신에 속하여 사람들은 넓은문을 선택해서 갑니다. 이들은 신령한 은혜의 세계에 대하여 거의 아는 것이 없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요3장에 율법학자인 니고데모에게 “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를 볼수 없으느니라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조건으로서 영적 거듭남을 말씀하셨습니다. 그는 아주 평범한 진리조차 몰랐습니다. 넓은 문으로 간 사람은 신령한것에 관심이 없습니다. 그래서 자신의 구원에 관심도 없고, 영생에도 관심이 없습니다. 그는 지금 이 현실에서 어떻게 하면 탈피할수 있을까? 어떻게 복권을 사서 당첨할수있을까? 어떤 점집에 무당에가서 점을 쳐야 운수가 대통하고 앞날이 좋을까하는 생각을 하는 자가 교회안에 신자들이 너무 많다는 것입니다. 한국교회 성도들중 4명중 1명이 5년안에 점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점보는 것이 미신인지 인식하지 못한다는 심각한 상황이 교회안에 일어나고 있습니다.
둘째 예수님의 말씀인 복음에 감격이 없음
눅14: 28너희 중의 누가 망대를 세우고자 할진대 자기의 가진 것이 준공하기까지에 족할는지 먼저 앉아 그 비용을 계산하지 아니하겠느냐
29그렇게 아니하여 그 기초만 쌓고 능히 이루지 못하면 보는 자가 다 비웃어
30이르되 이 사람이 공사를 시작하고 능히 이루지 못하였다 하리라
예수님께서는 비유로 말씀하십니다. 누군가가 망대를 지을려고 할때에 망대를 짓다가 중간에 포기하게 되면 비웃음거리만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망대를 준공하기까지 그 망대를 지을 비용을 계산한 다음 아 이정도면 되겠어 하고 충분하다는 결론이 나오면 그때 망대를 건축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께서 이말씀은 하신 것은 많은 사람들이 아무 생각없이 예수님을 따라 나섰다가 막상 예수님을 믿어보니까 오히려 고난이 오니까 예수님을 믿는 것을 포기하고 따르지않는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오늘날 한국교회 코로나 팬데믹 시대에 어떻습니까? 한국교회가 코로나 시대에 많은 성도들이 교회를 떠나고 하나님을 떠났습니다. 온라인 예배를 드린다는 명목하에 성도들은 이 기회를 틈타 교회를 떠나버리는 일들이 일어났습니다. 원인이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교회를 떠난 신자들은 여러 가지 이유를 되겠지요. 정부에서 막지않느냐? 코로나 걸리게 되면 피해를 보지않느냐?등 여러 가지로 합당한 말을 할것입니다. 틀린말은 아닙니다. 그러나 이런 상태의 넓은 문을 선택한 신자에게서는 영혼의 싫증이 일어나게 된것입니다.
셋째. 죄에 대한 회개를 하지않는다는것
마11: 20예수께서 권능을 가장 많이 행하신 고을들이 회개하지 아니하므로 그 때에 책망하시되
21화 있을진저 고라신아 화 있을진저 벳새다야 너희에게 행한 모든 권능을 두로와 시돈에서 행하였더라면 그들이 벌써 베옷을 입고 재에 앉아 회개하였으리라
예수님께서는 두로와 시돈땅을 향하여 슬퍼하십니다. 화있을진저 라는 말씀은 “오호! 슬프다”라는 뜻으로 갈리리마을과 벳세대를 향한 하나님의 모든 권능을 시돈과 두로와 땅에 행하셨지만 그들은 회개하지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책망하십니다. 두로와시돈땅을 예수님께서는 소돔과고모라와 같다고 말씀하십니다. 소돔과 고모라가 멸망한 것은 우상의 찌들어있기 때문입니다. 세상의것으로 가득찬 상태이면 회개에 대해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이것이 바로 신자의 영혼의 마음이 병들었다는 것입니다. 자신의 죄에대한 민감한 신자는 반드시 회개하게 되어있습니다. 왜냐하면 자신의 모습을 늘 주님께 비추어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자신의 죄에 회개하지않는다는 것은 자신의 영혼을 방치하는 것으로 이것이 연결되는 것이 영혼의 싫증입니다.
내 영혼의 싫증
신자가 하나님을 향한 권태감을 가진것입니다. 권태감은 무기력증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없어지고 그저 그렇게 교회만 왔다갔다하는 신자로 변해버렸다는것입니다. 그렇다면 신자안에 영혼의 싫증인 권태감이 오는 원인 2가지입니다. 첫 번째: 근본적 원인 두 번째: 실제적 원인입니다.
첫 번째 근본적원인 : 타락한 죄인안에 있는 부패성입니다. 신자안에 죄의 본성이있고, 은혜의 본성이 있습니다.
하나님을 향한 사랑과 열정이식어지게 되면 부패한 본성이 작동되면서 영혼의 싫증이 일어나게 되는것입니다.
두 번째 근본적원인 : 인간의 불완전한 상태입니다. 처음 창조된 인간은 완전했습니다. 그러나 죄가 우리에게 들어오면서 완전한 인간은 불완전한 상태로 살아가게 되었습니다. 여전히 우리는 죄아래 사는 존재로 살아갑니다. 그래서 우리안에 하나님의 은혜와 감사가 사라지게 된순간부터 내안에 있는 영혼은 반대의 길을 서게됩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향한 싫증입니다. 내안에 감정의 정서가 메말라버린것입니다. 그래서 교회안에서 성도들이 회개하고 눈물을 흘리거나 간절히 기도하는 그런 분위기도 싫어지게 되고 거부감을 느끼게 되는것입니다.
이번에는 영혼의 싫증에서 실제적원인 : 첫 번째 온전함을 추구하지 않는다. 두 번째 마음을 지키지 않는다는것입니다. 우리안에 영혼의 싫증을 퇴치하기위해서는 어떻게 해서든지 하나님앞으로 달려가야 합니다. 마음에서는 싫증을 느끼더라도 자신의 감정보다 하나님만 생각하면서 하나님앞으로 생각도 행동도 뒤따라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온전함입니다. 우리는 한번쯤 하나님의 사랑을 받아보았던 신자들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앞에 나와서 내가 왜 싫증을 내는지, 무엇 때문에 이런 하나님과의 관계가 멀어졌는지를 봅니다.
여기서 우리는 싫증에 대한 생각보다 하나님과 더 깊은 교제의 시간을 가지고, 자신의 모습을 비추어보아야 한다는것입니다. 그래서 두 번째 마음을 지켜야 합니다. 마음에서일어나는 싫증은 다른 모든죄의 시작처럼 어느 한순간에 갑자기 발생한 것이 아니라, 오랫동안 죄아래에서 머물면서 죄를 외면하고 내버려 두었기 때문입니다 다시말해서 죄가 싹트도록 내버려 두었고,가라지가 생겼어도 뽑지않았고, 죄에 대해 관심을 두지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마음을 지키지 못한 결과로 영혼의 싫증이 온것입니다.
저도 저 영혼을 지킬려고 할때에 싫증이 올때도 있습니다. 그럴때마다 마음을 다시 지킬려고 하나님께 기도합니다.
어떻게 하면 하나님을 기쁘게 할수 있을까요? 하면서 자꾸 생각의 죄를 씻을려고 합니다.그러면 성령께서 다시 치유해주시고 회복시켜주십니다.
넓은문은 결국 : 멸망
넓은문으로 들어가는 사람은 결국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7:13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
넓은문으로 들어간사람의 끝은 멸망 즉 심판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결국 영혼의 구원에 이르지 못하고 마침내 영혼의 멸망, 영육의 멸망을 당하게 됩니다.
넓은문으로 들어간 신자의 마지막은 바로 심판의 자리에 서게 된다는 것입니다. 잊지마세요! 하나님의 반대로 가는 세상의 문은 넓습니다. 그런데 그 문은 많은 사람이 갑니다. 그러나 끝은 심판이라는 사실을 말입니다.
이젠 좁은문으로 들어가는 자 :
마7:13.좁은문으로 들어가라
14.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자가 적음이라
눅13: 23 어떤 사람이 여짜오되 주여 구원을 받는 자가 적으니이까 그들에게 이르시되
24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쓰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들어가기를 구하여도 못하는 자가 많으리라
예수님께서는 좁은문으로 들어가라고 말씀하십니다. 어떤 사람이 주여 왜! 구원받는사람이 적습니까? 라고 질문하자 예수님께서는 좁은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쓰라고 말씀하십니다. 힘써서 들어갈려고 해도 구원받지 못한자가 많다는 것입니다.
.좁은문 : 헬/스테네 펠레 : 문의 크기가 작다는 의미보다는 들어가기 어렵고 보잘것없는 문을 의미
.협착 : 헬/테들림메네 : ‘우겨싸다’ (고후 4:8),‘환난받다’ (고후1: 6)로도 번역되는 단어로서 타인으로부터 고통받는 삶을 의미한다. 이는 그리스도를 따르는 길은 비록 생명이 보장되어 있으나 그 과정에 있어서는 끊임 없이 고난
을 받을 수밖에 없음을 보여 준다
눅13:24 좁은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쓰라에서 힘쓰라 ‘아고니제스데’ 의 경기에서 상을 얻기 위하여 ‘경쟁하다’,싸우
다’ / ‘최선을 다하다’ 는뜻입니다. 그러므로 좁은문으로 들어가도록 최선을 다하라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좁은문으로 들어가는 사람이 적은이유가 무엇입니까? 바로 문이 좁고 길이 협착하기 때문에 그 문을 찾기 힘들다는 것입니다. 즉 협착이 무엇입니까? 우겨쌈을 당하고, 환난인 핍박과 박해 때문입니다. 이땅에서 거룩하게 살고 거룩하게 살고자하는 신자는 반드시 박해가 시작됩니다. 그것은 예수님께서 분명하게 말씀하십니다. 예수님 때문에 박는 박해가 심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끝까지 견딘자가 구원에 이르게 되기 때문에 좁은문이 들어가라고 말씀합니다.
얼마나 좁은 문인가?
마5:10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는자는 복이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 예수님을 믿는것 때문에 받는 박해를 말씀합니다.
마10:18 또 너희가 나로 말미암아 총독들과 임금들 앞에 끌려 가리니 이는 그들과 이방인들에게 증거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
10:22 또 너희가 내 이름으로 말미암아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을 것이나 끝까지 견디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 예수님은 자신 때문에 높은 위정자들에게 끌려갈 것이다. 오히려 그것이 이방인들에게 증거가 된다고 말씀합니다. - 지금 북한과 중국에 얼마나 많은 기독교인들의 박해가 심합니까? 북한은 기독교인으로 잡히면 바로 죽습니다. 중국은 어떻습니까? 시진 핑이 들어오면서 10년넘게 집권하면서 중국에 교회가 불타고 무너지고 성도들은 박해와 감옥에 갇히는사건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이름 때문에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는 고난을당한다고 말씀합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끝가지 견뎌라 그러면 구원을 얻는다고 말씀합니다. 얼마나 좁은문입니까?
마10: 35내가 온 것은 사람이 그 아버지와, 딸이 어머니와, 며느리가 시어머니와 불화하게 하려 함이니
36사람의 원수가 자기 집안 식구리라
38 또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자도 내게 합당하지 아니하니라
예수님께서는 아무리 가족간이고 혈연적 일치감을 갖고 동질성이 강한 가족이라도 “신앙의 문제”가 다르면 결코 하나가 될수 없다는 뜻으로 신앙의 이유로 인해 가족이 가족을 고발하고 핍박하고 죽게 만드는 핍박이 올것임을 말씀합니다. 얼마나 좁은문입니까?
좁은문으로 들어가야할 우리의 모습:
우리는 날마다 갈등합니다. 하루에 수십번식 갈등하면서 생각합니다. 내 육신은 편안한 삶을 추구하기를 원합니다. 그래서 우리의 육신의 몸은 이렇게 말합니다. /꼭 이렇게까지 신앙을 지켜야 하는가? 꼭 꼭두새벽까지 일어나 새벽기도를 해야하는가? 꼭 기도를 해야하는가? 꼭 성경을 읽어야 하는가? 등 우리의 육신은 이렇게 편하게 답을 낼려고 합니다. 그리고 편안한 몸은 우리의 생각을 자꾸 편안한쪽을 선택하게 만듭니다. 그런데 우리가 잊지 말 것은 우리는 육신의 몸을 가지고 있지만 영혼을 가진 영적인 사람입니다. 개나 돼지는 영혼이 없기 때문에 먹고 자고 자기에게 잘해주면 끝납니다. 그러나 인간은 영과육이 함께 존재합니다. 그래서 육신은 운동을 해서라도 건강한몸을 가질수 있습니다. 그런데 영적인 것은 달리기나 역기를 든 운동을 해서 되는 것이 아닙니다. 영적인 건강을 얻을려면 헤로운 것을 해서는 안됩니다. 영적인 건강은 예수님을 만날 때 영적인 것이 해결되는 것입니다.
첫째. 예수님의 죽음을 몸에 짊어지라.
고후 4:10 우리가 항상 예수의 죽음을 몸에 짊어짐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
우리는 날마다 부패한 자신과 싸우며 거룩한 삶을 살아가기 위하여 고군분투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기위해서는 우리는 예수님이 지신 십자가를 몸에 짊어져야 합니다. 여러분! 혹시 기회가 되신다면 늦지 마시고, 교회안에서 진심어린 회개를 하시길 원합니다. 가슴을 치며, 다른사람을 보지말고, 자신의 죄악된 모습을 보시고 간절한 회개를 하시면서 십자가를 지지않고 가고있는 나의 모습을보시길 바랍니다. 우리가 주님의 지신 십자가를 지지않고 가는 신자는 절대로 좁은문으로 들어갈수 없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이 예수님이 지신 십자가를 져달라고 하나님께 간구해 보시길 바랍니다. 좁은 문은 예수그리스도를 만나는 문입니다. 변화는 예수그리스도를 만날 때 나타나는 현상입니다.
여러분이 십자가의 고난을 담당하신 예수님을 만날 때 성장하는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입니다.
거듭남은 반복될수 없는 일회성이지만, 그러나 십자가와 그리스도에 대한 경험은 우리의 삶속에서 계속적으로 반복되어야 합니다.
둘째. 예수그리스도를 경험해야합니다.
갈2:20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좁은문으로 들어가는 신자는 예수님과 함께 사는 신자입니다. 연약하고 부족하지만 주님의 십자가를 생각하면서 이런 고백합니다. 주님! 이제는 내 마음대로 살고 싶지않습니다. 주님이 내안에 거하시면서 사신것처럼 나역시 주님안에 거하면서 살아가기를 원합니다. 주님과의 더 깊은 교제속으로 들어가고 싶어하는 갈망이 없다면 우린 삶속에서 변화가 맛볼 수 없습니다.
교회에서 세상에서 여러분에게 그리스도인또는 예수님을 믿는 신자 또는 크리스천이라고 부릅니다. 그리스도인, 크리스천이라는 단어는 헬/크리스티아노스또는 크리스토스 :그리스도에게 속한자, 그리스도를 진심으로 추종하는사람이라고 부릅니다. 누가 그리스도에게 속한 사람입니까? 십자가상에 로마군인들이 큰 대못으로 예수님의 손과발목에 망치로 박을 때 뚝뚝 떨어지는 피의값이 떨어질때마다 인류의 모든 저주가 끊어졌습니다.
2000년전 골고다 언덕의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이 자기 목숨을 아끼지아니하시고 버리시기까지 나를 얼마나 사랑하셨는지를 느낄대 비로소 우리는 예수님을 경험할수 있는것입니다.
셋째. 좁은문은 가장 비싼값을 치루고 삶을 사는 삶입니다
마13:45 또 천국은 마치 좋은 진주를 구하는 장사와 같으니
46극히 값진 진주 하나를 발견하매 가서 자기의 소유를 다 팔아 그 진주를 사느니라
진주장사의 비유입니다. 진주 장사가 값진 진주를 확보하기위해 여러곳을 두루 다니다 가장 좋은 진주를 하나를 발견했습니다. 진주장사는 그 진주의 가치를 알기 때문에 자기 소유를 모두 다 팔아 그 진주를 샀습니다. 좁은문은 찾아 들어가는자도 이와같습니다. 좁은 문으로 들어가는 것이 그의 인생에서 얼마나 소중한지 알기에 어렵고 힘들어도 그 문으로 들어가려 애써야 합니다. 여러분! 좁은문으로 들어가게 한 신자들에게는 주님께서는 약속하셨습니다.
가장 확실하고 보장된 문을 열어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왜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이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쓰라고 말씀하실까? 약속이 보장되어있기 때문입니다.
좁은문만이 생명의 문이고 구원의 문이기 때문입니다. 14절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 이다
기독교는 절대로 값싼 복음을 전하는 종교가 아닙니다. 가장 가치있고 귀하고 소중한 것을 전하는 복음중에 복음을 전하는 종교입니다. 기독교는 생명을 전하고, 생명을 얻는 영혼들이 구원에 이르러 주님이 계신 저 아름다운곳 하나님의 나라로 인도하기 위한 삶의 과정이 좁은문으로 가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선택하시되 좁은 문으로 들어가시길 바랍니다 그길은 외롭고 힘든 과정인 고난을 반드시 거칩니다.
좁은길, 문의 과정은 고통이지만 열매는 달습니다. 양파의 껍질을 벗기듯이 신앙의 유아상태에서 벗어나 진정한 신자로 거듭난 과정이 바로 좁은문, 좁은길을 선택한 사람들의 아름다운 모습입니다.
저는 금요일날 훈련 때문에 남자 5000미터 쇼트 트랙경기를 보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후에 뉴스에서 5000미터를 뛰었던 선수들이 결승선에 1등으로 들어오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경기가 끝난후 기자회견을 하는데 기자가 어떤 질문을 던졌습니다. 그때 빨간머리를 한 곽윤기라는 선수가 이런말을 합니다. “ 제 삶의 기준이 흔적이 남는삶을 사는게 제 목표인데 이번 베이징에서 대한민국 쇼트트랙 역사에 흔적을 남기고 가겠습니다” 라고 대답을 하는 인터뷰를 들었습니다. 각오가 대단했습니다.
구원의 흔적을 남기는 사람.
여러분은 이땅에서 무슨 흔적을 남기시겠습니까? 좁은길을 통하여 구원의 흔적을 남기는 신자가 되시길 원합니다. 예수님의 구원의 삶을 흔적을 남기는 것은 십자가의 길을 가는 성도들이 들어가야할 길, 좁은길을 가는 신자입니다. 이땅에서 좁은길을 걸었던 성도들에게 훗날 예수님께서는 천국문을 여시고 두팔려 안아주실것입니다.
갈6:17 이 후로는 누구든지 나를 괴롭게 하지 말라 내가 내 몸에 예수의 흔적을 지니고 있노라
사랑하는 은성교회 성도님! 이한주간 좁은문으로 들어가기위해 비싼값을 주고사는 진주장사꾼처럼 소중한 가치를 발견했으면 그 진주를 사기위해 자신의 삶의 방식을 좁은문으로 선택하는 아름다운 신자가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