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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2022.5.22.

채인기 목사

 

성경본문: 고후5:13-17

제목 : 그리스도안에서 새로운 생명으로

 

데일 카네기가 쓴 희망은 절망을 이긴다 라는 책은 카네기행복론으로 우리나라에 번역되었습니다.

그는 이책을 쓰기위해 7년간 연구를 하며 많은 사람이 삶에서 겪는 가장 큰 문제가 염려라는 것을 발견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염려에 대한 해결책을 찾기위해 많은 책을 읽고 많은 사람을 만나 인터뷰를 했습니다. 그 결과 많은 지도자가 위인이 될수 있었던 이유는 염려가 없었기 때문이 아니라, 염려를 극복했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염려는 생각의 문제라고 말합니다. 내가 해야한다는 강박관념이 낳은 부산물이란 말입니다. 그래서 염려하는 사람들의 주어는 항상 나입니다. 염려하는 사람들의 주어는 나이지만 예수님을 믿는 기독교인들의 주어는 하나님이라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3장에서 예수님과 니고데모의 대화중에 성령으로 거듭나야함을 피력합니다. 성령으로 다시 태어나지 않으면 하나님의 나를 볼수도 들어갈수도 없음을 말씀합니다. 다시말하면 성령으로 거듭나야만이 하나님의 나라를 이땅에서 누릴수 있고, 하나님의 나라인 천국에 들어갈수 있다는 것입니다.

니고데모는 예수님의 말씀의 의미는 모르지만 자신이 무엇인가의해 변화되어야 한다는 것은 알았습니다.

예수님은 율법학자인 니고데모에게 새로운 삶을 요구하고 계신것이었습니다. 오랫동안 몸에 습관처럼 베어버린 율법의 행위나 전통에 또 다른 의식을 추구하는 방식이 아니라, 전혀 새로운 삶인 영적으로 온전히 새로워진 생명을 얻어야 함을 말씀하고 계신것입니다. 예수님은 성령으로 거듭남을 말씀하셨습니다. 한밤중에 은밀히 찾아왔던 니고데모가 마침내 참 빛이신 예수님께 이끌려 진실한 신가가 되었습니다. 그 근거는 요19:39절입니다.

니고데모와 아리마대 요셉이 십자가에 죽으신 예수님의 시신을 장사지내는 장면에서 볼수 있습니다.

19:39 일찍이 예수께 밤에 찾아왔던 니고데모도 몰약과 침향 섞은 것을 백 리트라쯤 가지고 온지라.

니고데모는 예수님의 시체에 몰약과 향을 가지고 와서 시체에 뿌릴려고했던것입니다. 산헤드린 대중을 선동해 예수님을 살해하도록 유도한 상황에서 모든 것을 잃어도 좋다는 각오가 아니면 그런 행동을 불가능했습니다. 분명 니고데모는 예수님과 대화를 통하여 새로운 삶의 요구를 받아들였던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사도바울의 변화된 모습을 통하여 전인적 변화에 대한 온전함을 드러내는 말씀입니다.

 

부패한 나의 본성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부패한 본성을 가진채 신앙생활을 합니다. 설교말씀을 많이듣고 성경공부도 많이 하지만 그러나 결정적일 때 많이 믿음생활에서 쓰러지고 미끄러지게 됩니다. 삶의 고통은 계속 다가오고 그것을 이길만한 힘은 나에게 없고 그래서 어쩔때는 신앙의 갈등 때문에 신앙마저 내려놓고 싶고, 자기 마음대로 살아가고 싶은 충동을 느끼게 할때가 한두번이 아닙니다. 어쩔때는 정말 신앙생활이 너무나 힘이들어 주저앉고 싶은마음이 너무나 많이 들때도 있다는 것입니다. 자꾸 자신에게 채찍질을 합니다 자꾸 안돼는 나의 모습을 보면서 절망합니다.

 

이것은 인류 최초 인간인 아담 안에있는 타락한 영적상태의 모습입니다. 아담은 타락함으로써 하나님과원수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와 동시에 아담은 전적으로 부패한 피조물이 되었습니다.

이런 마음의 상태에서 어떻게 선한 것이 나오겠습니까? 절대 선한 것이 나올수 없습니다.

성경은 6:5 여호와께서 사람의 죄악이 세상에서 가득함과 그의 마음으로 생각하는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할 뿐임을 보시고 하나님은 말씀하십니다.

우리 영혼의 상태는 그래서 두가지로 나눕니다. 모든 사람의 상태가 외에 없이 이런 상태에 놓여져있습니다.

먼저 한가지는 구원에 이르는 상태이고, 다른 한가지는 지옥에 떨어질상태입니다. 또 의의 상태이고, 죄의 상태입니. 이런 상태로는 하나님을 알수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니의 성품의 속성도 뜻도 알수없이 방황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참감람나무로 접붙임을 하라

포도나무에서 무화과 열매를 맺을수 없듯이 좋은 나무에서 좋은 열매를 맺고, 나쁜 나무에서는 나쁜열매를 맺을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는 돌감람나무에서 참감람나무로 접붙임을 해야합니다.

다시말해서 타락한 본성에서 하나님의 본성으로 접붙임을 해야한다는 것입니다.

11:17 또한 가지 얼마가 꺽이었는데 돌감람나무인 네가 그들중에 접붙임이 되어 참감람나무 뿌리의 진액을 함께 받는자가 되었은즉

23 그들도 믿지 아니하는데 머무르지 아니하면 접붙임을 받으리니 이는 그들을 접붙이실 능력이 하나님께 있음이라

돌감람나무의 의미는 하나님의 백성에서 제외된 이방인들이고, 참감람나무는 하나님의 백성인 신자입니다.

우리는 타락한 본성인 돌감람나무가지를 잘라서 참감람나무이신 하나님의 가지에다 접붙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원뿌리가 참감람나무가 되기 때문에 하나님께로부터 공급을 받아야 하는 존재입니다. 접붙임이 없는 신자는 돌감람나무로써 옛본성을 가지고 그대로 살아가게되면 사람들이 먹을수 없고 입으로 내 뱉어버리는 쓰디쓴 열매일 뿐입니다. 하나님으로부터 버려지는 존재가 되어버릴수 있다는 것입니다.

 

살아있으나 죽은 교회와 성도

하나님의 생각과 인간의 생각이 전혀 다른 한 교회와 성도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교회와 성도의 행위를 보시고 죽은 교회이고 온전함을 찾지못하는 성도라고 판단하시고 말씀하십니다.

3:1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내가 살았다하는 이름은 가졌으나 죽은자로다

3:2 너는 일깨어 그 남은 바 죽게 된 것을 굳건하게 하라 내 하나님 앞에서 네행위의 온전한 것을 찾지 못하였노니

예수님께서 교회의 성도들의 행위를 보는데 가관이 아닙니다. 자기들끼리 말하기를 너는 살았다고 말합니다.

내가 널 볼때는 열심히 교회에서 봉사하니까 살아있는 것 같다. 내가 널 볼때는 이땅에서 무엇인가를 최선을 다해서 살아가기 때문에 살아있는 것 같다고 자기들끼리 말을 합니다.

그런데 정작 하나님께서는 사데교회 신자들을 영적으로 죽었다고 말을 합니다. 왜냐하면 2절 네 행위의 온전한 것을 하나님은 찾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온전함이 무엇일까요? 성도의 온전함을 찾지못했기 때문에 예수님은 영적으로 죽었다고 말씀하십니다. 성도들 자기들끼리는 살았있는것처럼 보여 인정하는데 정작 예수님은 사데교회와 성도들에게 인정하시지 않습니다. 죽은 교회와 성도로 인정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보시는 온전함이란 무엇일까요? 오늘 본문은 사도바울을 통하여 그리스도안에서 새로운 생명으로 다시 태어나므로써 온전함을 보여주고자 합니다.

 

내가 미쳤어도 하나님을 위한 것이다

사도 바울은 자신의 온전함을 말을 보여주는데 이렇게 고백합니다.

13 우리가 만일 미쳤어도 하나님을 위한 것이요 정신이 온전하여도 너희를 위한 것이니

사도바울은 어떤 사람들이 자신을 향해 미친 사람이고 한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그의 말에 개의치 않는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자신이 미친 것은 하나님과 교회와 성도를 위해 자신의 전 생애를 섬기고 있기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자신은 사도로써 다메섹도상에 완전히 예수님을 믿은후에 자신의 생애 전부를 예수님을 위해 한평생을 살았던 사람으로써 가장 귀한 가치를 발견하고 살고 누렸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또 이렇게 고백합니다. 14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강권하시는도다 라고 말입니다.

사도 바울은 예수님을 사랑을 너무나 많이 받은 사람이었습니다. 바울 자신은 예수님을 위해 살아가고 예수님 때문에 살아가게 만드는 강력한 이끄심이 있었서는데 바로 하나님의 사랑이 나를 강권했다고 말을 합니다.

바울은 본문을 통하여 자신의 놀라운 변화의 모습을 고백합니다

바울은 자기 자신에 대해 죽고, 예수그리스도에 대해서는 살아있음을 고백하면서. 자기 자신의 뜻에 따라서 살지않고, 자신을 구속하신 예수그리스도 그분의 영광과 그뜻에 따라서 살았음을 고백합니다.

바울이 믿는 예수님은 완전한 사람이아니라 온전한 사람으로 변화시켰습니다. 그가 만난 예수님을 바울은 본문에서 드러냅니다. 바울의 놀라운 변화는 무엇인가?

첫째. 바울의 놀라운 변화? 자신을 위한 삶이 아니라 주님을 위한 삶“. (삶의 목적이 다름)

14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강권하시는도다 우리가 생각하건대 한 사람이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었은즉 모든 사람이 죽은것이라

15 그가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으심은 살아 있는 자들로 하여금 다시는 그들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고 오직 그들을 대신하여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신 이를 위하여 살게 하려 함이라

바울은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은것이라면 그 한 사람이 대신하여 죽음으로써 그가 대신한 그 모든 사람은 다 죽은것이라고 말합입니다. 한 사람이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은 것은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에게 부어졌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은 그가 십자가에 죽으셔야 하는것입니다. 왜냐하면 십자가의 죽으심이 아니면 우리는 절대로 살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하나님의 사랑이 강권하셨기 때문에 세상의 죄의 굴레에 빠져 자기멋대로 사는 존재가 아니라, 자신의 소유, 권리등 포기하면서까지 주님을 위한 삶을 살아가고 있다고 말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은 자신의 죽음까지도 뛰어넘는 힘이 있었기 때문에 그 사랑의 사로잡혀 살았습니다.

우리 마음안에는 자아가 있습니다. 즉 생각,감정,의지라는 3가지 자아가 자리잡고 있습니다. 세상사람들의 자아는 세속적인 자아로 가득차 있습니다. 세상것으로 가득차있습니다.

이 자아는 부패한 본성의 죄성이 사로잡고 있습니다. 예수님을 믿지않는 자아는 세상의 목적이고, 예수님을 진실로 믿는 사람에게는 예수님이 목적이 됩니다. 세상사람들은 옛자아의 본성대로 살아갑니다. 세속적인 흥밋거리에 관심을 갖습니다. 오직 자신에게 이익이 되는 것만을 사랑하며 영적인 가치에는 관심도 갈망도 없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믿는 신자에게도 옛자아의 본성대로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피속에는 십자가의 피, 보혈의 피가 아닌 욕망의 피로 채워지고 있습니까?, 그렇다면 여러분은 아직 성숙한 자아가 형성되지 않았습니다.

 

자신의 자아가 쓴 뿌리가 되어 내면의 상처로 아직 치유되지 않았기 때문에 조금만 어려운 상황에서도 금방 넘어지게 됩니다. 금방 넘어진 것은 자신을 위하여 살았기 때문에 그것에 만족하지 못하면 상한 심령으로 자라게 되어 쓴뿌리가 되어 갑니다. 마치 어린아이가 엄마에게 사주지않으면 앉아서 때를 쓰는것처럼 자신의 것에만 집중하고 고집을 부리는 것입니다. 이런 쓴 뿌리는 독이 됩니다. 독은 다른사람에게 상처를 줍니다.

이 상처가 예수님을 통하여 치유되지 않는 상태에서 계속 자라기 때문에 다른사람을 포옹할수도 사랑할수도 없게 되어버렸던것입니다. 오히려 자신에게 오는 사람들에게 독을 품고있기 때문에 상처의 독을 주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치유되지않는 자신의 자아의 상태에서 하나님의 사랑을 몰랐기 때문에 그 독을 가지고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을 죽이고 핍박하고 감옥에 집어넣는 것을 아무런 감각없이 행동을 했던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랑이 강권하여 예수님을 만난후 그 독은 사라지고 생명을 살리는 구원의 약을 주었습니다. 그 약을 먹었던 사람들은 구원을 이르게 되었던것입니다. 썩어 냄새나는 것에는 꿀벌은 다가오지 않습니다. 파리떼만 득실거립니다. 꿀벌은 아름다운 꽃을찾아 꿀을 생산합니다. 인간들에게 유익을 주는 꿀을 제공합니다. 파리때는 어떻습니까? 병균을 옮기지 않습니까?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강권적으로 임하기를 원합니다.

 

둘째. 바울의 놀라운 변화? : 자신의것을 다 바꾸어도 하나도 아깝지 않는 것

13우리가 만일 미쳤어도 하나님을 위한 것이요 정신이 온전하여도 너희를 위한 것이니

바울은 무엇 때문에 미쳤다고 소리를 듣습니까? 13절 하나님을 위해 미친것이라고 말을 합니다.

유대인들은 바울이 예수님의 복음을 전하는 것을 보면서 무절제하고 제 정신이 나간것처럼 비쳐졌습니다. 그러나 자신이 하나님 때문에 미친것이고 자신이 정신이 온전한 것은 너희를 위한 것이라고 말을 합니다. 자신의 절제함을 드러내는 표현으로 고린도 교인들을 위하고 그의 복음이 거리낌이 없도록하기 위해서 온전하다고 말을 합니다.

사도들의 복음을 들었던 사람들은 사도행전에서 3,0005,000명의 사람들이 예수님을 영접했습니다.

 

바울이 하나님과 교회와 성도들을 위해 복음 때문에 미칠수 있었던 것은 다른것에 미쳐서 살아가고있는 온전하지 못한 사람들을 위하여 모든 것들은 다시 주님께로 시선을 돌렸습니다. 바울은 오직 한분 예수님을 얻기 위해 다른

세상의 학문, 학벌, 소유된 부, 심지어 출세까지도 배설물로 여겼다고 고백합니다.

3:7.그러나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뿐더러

8.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를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기때문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바울은 자신의것을 다 바꾸어도 하나도 아깝지 않았습니다. 그 삶을 보여주는 모든 기록은 자신의 것이 하나도 없었습니다. 바리새인이지만 바리새인다운 모습은 하나도 없었습니다. 그는 세상학문으로는 최고의 엘리트 코스에서 배워서 학문은 뛰어나지만 세상의 철학이나 학문은 하나도 드러내지 않았습니다.

오직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에 대한 말씀과 그 말씀을 주실 때 잘 풀어서 가르쳤습니다.

성도님!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의 가치를 발견했다고 하면서도 아직도 자신의 소유도 권세도 세상의 학문도 출세도 다 그대로 유지한채 살아가는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예수님안에 있으면 참된 평안이 있다고 알면서도 아직도 네마음은 텅빈마음처럼 채워지지 않는 것이 있다고 떠들어대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욕망과 탐심입니다. 이것은 인간이 가지고 있는 본성말입니다. 둘다를 놓칠수 없는것입니다. 세상의 욕망도 예수님도 놓을려고 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여기에는 참된 행복이 없습니다. 참된 행복은 예수님안에서 누리는 것입니다. 양다리를 걸쳐서 세상의 눈치도보고 예수님 눈치도 보고 살아야 하는 인생이다보니 참된 행복을 누리지 못한것입니다.

지금 우리가 잡고있는 세상의 동아줄은 썩어가는 동아줄입니다. 그러나 아주 튼튼하고 견고한 줄이있는데 그 줄은 예수님의 강력한 힘의 줄을 잡고 있다는 것입니다.

 

톨스토이 저서중에 이런 내용있습니다. 세상의 물욕이 삶을 어떻게 망가뜨리는 것이 보여주는 사람에게는 땅이 얼마나 필요한가내용이 있습니다. - 도시에 사는 언니와 시골에 사는 여동생이 나누는 대화로 시작됩니다

서로 자기가 사는 곳이 더 좋다고 주장하는 자매의 대화에 동생의 남편인 파흠이 끼어듭니다. ”농부들은 농사지을 땅만 있다면 악마나 다른무엇이라도 두려울게 없다자기 부인의 주장을 거들어줍니다.

이를 듣고 있던 마귀가 화가 났습니다. 그래서 파흠이라는 사람을 타락시키겠다고 계략을 세웁니다.

그를 땅으로 미혹하기위해 파함은 친척들에게 돈을 빌려 작은땅을 샀습니다. 그런데 1년만에 돈을 다갚고 땅 주인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웃 농부들과 사소한 갈등이 생기게 되었고 더 넓은 땅을 분양받아 이사를 갑니다.

땅은 세배로 늘어나고 살림살이는 열배나 나아졌습니다. 생활이 안정되자 그곳도 좁게 여겨졌습니다.

파흠은 일 년이 걸려도 돌아볼수 없는 넓은 땅이 있다는 소문을 듣게 되었고, 어느 원주민이 살고 있는곳을 갑니다. 그 땅은 소문대로 아주 저렴하게 살 수 있는 넓은 땅이었습니다. 주민들은 파흠에게 제안을 합니다. 오늘 하루동안 돌데 저녁 몇시까지 정확하게 들어와야 돌았던 땅 만큼 가져갈수 있다고 약속을 합니다. 파흠은 새벽부터 돌아다니는데 땅은 정말로 넓었습니다. 파흠은 시간이 되어 조금이라도 더 넓게 가질려고 쉬지않고 열심히 돌아다녔습니다. 지치고 힘들었지만 땅을 밟을 대로 가져간다는 욕심 때문에 계속 걸었습니다. 그런데 그만 시간이 점점 돌아가야할 시간이 가까워져갑니다. 빨리 가지않으면 이 땅을 차지할수 없을수 있었습니다. 파흠은 빨리 오느라 결국 목적지에 도착했지만 그만 심장마비로 죽고 맙니다. 원주민들이 파흠을 묻어주었는데 그 무덤은 고작 한평도 되지않는 땅이었습니다.

 

셋째. 예수님은 나에게서 어떤 의미를 주는가? : 이제부터.. 달라집니다

16그러므로 우리가 이제부터는 어떤 사람도 육신을 따라 알지 아니하노라 비록 우리가 그리스도도 육신을 따라 알았으나 이제부터는 그같이 알지 아니하노라

사도바울은 육신에 따라 살았다면 이제부터는 육신에 따라 살지않고 더 이상 외적인 판단에 의존하지 않도록 하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마주하고 보여주는 눈은 부동산, 주식, 비트코인인 가상화폐과 같은 재물과 매일 접촉하며 살아갑니다. 재물이 없이 살아갈수 없는 환경입니다. 예수님이 가르쳐주신 주기도문 일용할 양식을 내게 주옵소서라고 기도하고 있는 우리에게 이 고백이 단순히 그날 양식만을 구하는 기도가 아니라는 것을 알것입니다.

일용할 양식을 주시옵서 라는 기도의 의미가 무엇입니까?

단지 음식만 달라는 기도가 아닙니다. 양식이란 의미는 음식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라, 하루의 삶을 위해서 필요한 모든 것을 공급해 달라는 기도입니다.

오늘만 필요한것들을 구하는 기도는 욕심에 대한 자기 절제가 포함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왜 기도에 욕심에 대한 자기 절제가 포함되어있을까? 그것은 부패한 인간은 일용할 양식만 구하는 것 이상으로 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온통 목적이 되어 살아갑니다. 바울은 예수님을 만나후 그때부터 완전히 달라진 삶을 살았습니다.

육체를 따라 판단하고 학벌이나 배경의 가치를 세상의 기준에 따라서 판단하지 않고 세속적인 이익을위하여 사람들을 선호하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이제부터 성령님을 의지하지않고 외적인 평가에 기준에 살고, 보여주는 것으로 좋아하는 사람들의 모습처럼 살지 않겠다고 말합니다.

예수님은 우리 인생을 완전히 뒤집어 엎힐 능력이 있습니다. 완전히 새롭게 변화시킬수 있는 능력이 있으시는 분입니다. 문제는 우리가 완전히 뒤집어지기를 원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 모든 것을 맡기면 뭔지 모르지만 손해보는것같은 마음을 갖는 것 같습니다. 자꾸 하늘의 것만 바라보게 하기 때문에 이땅에서 즐거움과 쾌락을 즐기지못한 손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바울은 이제부터 달라져야 한다고 증거하고 있습니다.

 

새로운 피조물이 주는 의미 : 믿음과 사랑

17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

자신을 위한 삶이 아니라 주님을 위한 삶“. 자신의것을 다 바꾸어도 하나도 아깝지 않는 것 이제부터.. 달라집니다

바울은 예전의 바울의 모습이 아니라, 전혀 완전히 달라진 예수그리스도를 위한 삶의 모습으로 바뀌어진 자신의 모습을 보면서 결정적으로 결론을 내립니다. 자신뿐만 아니라, 누구든지 그리스도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 되고, 새것이 되었다는 것을 확신하면서 결단을 내립니다.

그리스도안에 있으면 라는 의미는 믿음과 사랑을 그리고 회개를 통해 예수님과 하나가 된 상태를 의미합니다.

예전에는 이것이 흠이었다면 이젠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흠이 흠으로 보이지 않습니다.

새로운 피조물이라는 것은 크티시스 원어로 하나님의 창조행위를 나타낼 때 예수님안에 있으면 새로운 창조행위인 새로운 존재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옛날의 감정과 옛날의 행동, 옛날의 기질등 나를 붙잡혀서 사는존재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지나갔습니다. 그래서 이제는 성령의 거듭났기 때문에 조금만 바꾼 것이 완전히 바꾸었기 때문에 이제는 우리는 새로운 사람이 되었다는것입니다. 옛날의 감정이 아닌 , 성령의 감동으로 / 옛날의 행동이 아닌 그리스도의 말과 행동으로 / 옛날의 기질이 아닌 완전히 바뀐 내면의 자아로 바뀌어져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내가 노력해서 얻은 것이 아니라,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로만 되었습니다.

 

예수님을 위해 자신을 드릴수 있는 삶의 적용:

첫 번째 기도부터 시작해야합니다.

3:27만일 하늘에서 주신 바 아니면 사람이 아무것도 받을수 없느니라.

진짜 하나님을 위해 자신의 전부를 드리고 싶어하는 정직한 기도가 나가는 문을 통해서 새롭게 은혜를 부어주십니다. 진짜 이렇게 하나님이 원하시는 삶을 살아보겠다고 정직한 기도를 드리는자에게는 하나님은 절대로 물리치시는 법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로 달려가야 합니다.

너무나 목이 말라 시냇가의 시냇물을 찾아다니는 사슴처럼 갈망하는 마음으로 주님을 만나기 위해 성령님을 의지하여 간절하게 기도해야합니다. 진짜 하나님앞에서 씨름을 해야 합니다. 자신의 자아가 하나님앞에서 벌겨벗져친채로 씨름할때에 어느 순간 그 시간에 성령께서 여러분에게 눈물을 흘리게 할것입니다. 그 눈물은 전에 흘렀던 그 눈물의 의미가 아닙니다.

그리고 그렇게 살아보겠다고 마음깊숙한 곳에서 다짐이 우러나옵니다. 그러면서 찬송도 기쁨으로 부르게 되고, 입술에서 말씀이 떠나지 않습니다. 꼭 성령의 거듭나고 싶다는 간절함의 기도가 반드시 있어야 합니다.

 

2.나의 본성의 부패함을 깊이 회개함.

자신의 병이 심각하다는 말이 들리기 전까지 반드시 치료를 받지 않는것처럼 자신의 더러움을 보지 못하고 깨닫지 못하고 살아가고 기도한다면 아무 생명도 조화꽃에 물을 주는것과 같습니다. 물은 생화인 살아있는 꽃에게 주는것입니다. 자신의 죄의 부패함을 생명의 수되신 예수님의 말씀으로 계속 물을 주어야 합니다. 반드시 어떤 자리에 앉아 있든지 간에 회개하면서 자신의 더러움을 씻어 내야 합니다.

 

3. 성령님을 계속 의지하시길 원함

우리는 예수님께서 삯개오게 말씀하셨던 말씀이 이루어져야 합니다.

삭개오야! 속히 내려오라! 내가 오늘 네집에 유하여야 하겠다라는 부르심을 많은 사람들에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자신의 마음의 집에 거하지 않기를 원하지 않고 말씀이 들리지도 않고 살아갑니다.

성령님을 계속 의지할려고 씨름하시면 성령께서 여러분의 마음을 두드리십니다. 그 두드림은 들리나 들리지 않은 세미한 음성입니다. 성령님의 부르심에 자신의 감정을 억누르지 마셔야 합니다. 자신의 감정을 성령님께 고백하시길 바랍니다. 적절한 반응은 중요합니다. 그때 성령의 역사에 반응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님!

이제부터 우리는 그리스도안에서 새로운 피조물이 되어 새 생명을얻었습니다. 그러므로 이제는 내가 살려고 하지 않고 내안에서 성령께서 나를 주관하도록 계속 마음을 일으켜야 합니다.

새생명을 얻는 사람은 행복합니다. 하나님만 바라봅니다. 형통케 하는 복이 임합니다. 사람의 말에 따라 내 감정이 움직이지 않습니다.

이 한주간 성령님의 인도하심에 따라 사실 때 행복한 삶, 누리는 삶을 사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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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3 2022.4.24 여호와를 앙망하는자 새힘을 얻는다 채인기 2022.04.25 48
82 2022.4.17 사망 권세를 이기시고 그가 살아나셨다 채인기 2022.04.17 50
81 2022.4.10 십자가상에 말씀하신 일곱말씀 채인기 2022.04.11 46
80 2022.4.3 나는 무엇을 가까이 하는가? 채인기 2022.04.07 54
79 2022.3.27 나를 움직이게 하는 힘 채인기 2022.03.28 60
78 2022.3.20 뒤틀린 부모사랑 채인기 2022.03.21 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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