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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2022.11.6.

채인기 목사

 

성경본문: 누가복음 23: 26-31

제목: 다시 복음앞에 1: 너희와 너희자녀를 위하여 울라

 

19506.25사변 당시 충남에서 강경침례교회를 담임하셨던 이종덕목사님의 이야기입니다. 조용하던 강경기방에 어느날 공산당이 들어오자 마을 사람들에게 두려운 마음이 생겼습니다. 그래서 그 다음날부터 마을 사람들은 그드르이 눈밖에 나지 않기 위해 모두들 공산주의자가 되어버린 듯이 행동을 했습니다.

그리고 예수를 믿던 사람들까지도 자신이 그리스도인임을 나타내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었습니다. 이 상황을 지켜보던 목사님은 후배 목사님에게 두껍고 큰 종이를 가지고 갑니다.

목사님, 이 두꺼운 종이는 무엇을 하려고 그러십니까?” “ 내 명함을 만들려고 하네

명함이요?” 생전에 명함 한 장 안 가지고 단니시다가 갑자기 명함을 만들려고 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이종덕 목사님은 물음에 대답은 하지 않고 후배 목사님에게 큰 종이를 명함 크기로 자르도록 시켰습니다. 그리고그 명함종이에 강경 침례교회 목사 이종덕이라고 쓰도록 했습니다. 후배 목사님은 시키는대로 쓰면서 다시 목사님께 묻습니다.

그런데 목사님, 이 명함을 어디에 쓰시려고 하십니까?”

이 명함을 가지고 다니면서 경찰이고 공산당원이고 내가 만나는 사람마다 모두 나눠주려고 하네

아이고 목사님 다른 사람들은 다 그리스도인이라는 것을 숨기려고 하는데 이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큰일이라도 당하시면 어떻게 하시려구요.“

아니, 이 사람이! 자네도 그리스도인이라는 것이 부끄러운가?” 내가 복음을 전하는 목사라는 사실을 숨겨야할 이유가 어디있냐?“

이종덕 목사님은 명함을 뿌리고 인민위원회 내무서 등을 찾아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구원받아 천국 갑시다.’ 전도하다가 9.28 수복 시에 퇴각하던 공산군에 체포된다. 이때 이미 순교를 각오한 이종덕 목사는 손목에 차고 있던 시계를 사모에게 주며 하늘에서 만납시다.” 말을 남겼고, 같이 끌려가던 김요한 집사에게 기회를 만들어 도피할 수 있도록 했다. 이 목사는 결국 옥녀봉 교회에서 잘 보이는 금강변 갈밭으로 끌려가 총살당해, 66세를 일기로 주님의 품 안에 안겼습니다.

 

본문배경

2,000년전 이스라엘땅에 인간의 죄를 대속하기위해 오신 예수님께서 자신의 사역을 다 이루시고, 이제 하나님의 뜻에 따라 십자가의 길 골고다언덕을 걸으십니다.

저 무지한 산헤드린공회원들 그리고 수많은 백성들이 예수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박으라고 외칠 때 로마총독 빌라도는 군중들을 의식하여 죄없으신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으라고 내놓습니다.

유월절 명절 인하여 예루살렘에 왔던 구레네 시몬이라는 사람이 밤새 모진 심문과 채찍의 고통 때문에 더 이상 십자가를 질수 없는 예수님의 십자가를 대신 지는 장면과 함께 예수님이 가신 십자가의 길을 뒤를 따라 가슴을 치며 슬피우는 여자의 큰무리가 따라오는 장면을 봅니다.

슬피우는 여인들을 향하여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예루살렘 딸들아! 나를 위하여 울지말고, 너희와 너희 자녀를 위하여 울라고 말씀하시면서 날이 이를 때가 올 것이다. 그때에 임신하지 못한여인, 아기를 낳아 보지 못한태와 젖을먹여 본적이 없는 가슴이 복되다라고 말씀하시면서 그때 사람들이 산에다 대고 이렇게 말할 것이다. “우리 위에 무너져 내려라할것이고, 또 언덕에다 대고 우리를 덮어 버려라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땅에 앞으로 있을 로마군대의 무서운 전쟁의 심판의 고통이 너무나 잔인하고 심하기 때문에 차라리 우리를 덮어 버려 죽었으면 좋겠다는 바램을 말할것임을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무거운 십자가을 지시고 골고다언덕으로 올라가고 계십니다. 우린 여기서 본문에서 예수님의 십자가가의 길이 우리에게 주는 의미가 무엇인줄 알아야 합니다. 첫째는 십자가의 길은 외롭고 고독한 길입니다.

예수님께서 이땅에 오신 것은 결국은 죄인된 우리를위하여 십자가에 달리시기 위함입니다. 예수님은 마지막 정점을 향해 달려가는 이 상황속에서도 처절하게 외로움을 경험하고 있습니다.

빌라도 법정에서 어느 누구도 예수님을 변호하는 사람이나, 아니면 예수님은 죄를 지으실분이 아니라고 말할수 있는 사람이 없었다는 것입니다. .아무도 예수님을 위해 십자가를 져주겠다는 사람도 없었습니다.

예수님이 무지한자들에게 채찍을 맞을때에도 아무도 옆에 없었습니다. 호산나를 외쳤던 수천명의 사람들 그리고 예수님께로부터 치유와 고침을 받았던 사람들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으라고 오히려 예수님을 버렸습니다. 그들은 구경꾼들이었습니다. 이렇게 예수님이 가신 십자가의 길은 외롭고 고독한 길이었습니다.

 

에수님의 십자가가 주는 의미 두 번째: 예수님의 십자가의 길은 눈물이 있는 길입니다.

예수님이 가신 골고다를 따르는 자들에 가슴을 치며 슬피우는 여인들이 있습니다.. 무디어져 버린 우리의 마음을 다시금 회복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과 길이라면 우리 역시 주님의 십자가의 길을 따르면서 울어야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가 주는 의미 세 번째 : 예수님의 십자가의 길은 사랑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에 십자가를 지신것입니다. 예수님의 사랑은 희생적인 사랑을 보여주셨습니다.

그 사랑이 우리를 살리셨고, 그 사랑이 우리의 삶을 살아가는데 힘이었습니다. 지금도 예수님의 사랑은 우리안에 흘러넘치고 있습니다.

 

세상속에서 의 모습 :

우리는 교회에 나오고, 예수님을 믿게 된 계기가 우리의 의지나 타인에 의해서 일것입니다. 예수님이 우리를 선택하셨다는 것은 전혀 생각해보지 않았을것입니다. 세상이 흘러가는데로 우리의 몸과 마음을 맡기며 살았습니다. 그것이 때로는 죄인줄 모른채 자신의 생각과 감정에 의해 살아갔습니다.

바울처럼 예수님을 믿는 신자들을 죽이고 핍박했던것처럼 우리 역시 교회를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을 미워하고 때로는 조롱하고 무시하고, 핍박을 주기도 했습니다. 바울이 고백한것처럼 자신을 죄인중에 괴수라고 고백한것처럼

세상의 풍조와 문화에 흡수하면서 살았던 자가 바로 였습니다.

 

그래도 끝가지 믿음을 지키려는 나의 신앙의 모습

그러나 어느날 갑자기 예수님이 내마음안에 들어오셔서 내게 말씀하시고 그 말씀이 들려지게 되었을때 세상과 충돌이 일어나면서 조금씩 내 안에서 보이지않는 믿음과 확신이 조금씩 자라게 되었습니다. 무엇이 옳고 그름인지 알게 되었고, 무엇이 선과 악인지 말씀에 비추어 살면서 혹 악인의 길을 걸을 때 나의 신앙의 갈등이 생겨 때로는 넘어질때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믿음이 생겨서 어려운 난관을 뛰어넘어 자라가는 것을 지금 우리는 겪고 있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알아간 후 제일 먼저 부딪히는 신앙의 갈등입니다. 즉 세상속에서 살아가는 나와 반대로 예수님의 길을 가기를 원한는 나와 언제나 선택에 기로에 갈등합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로 부르신 후에 그들에게 당부의 말씀이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라는 말씀이었습니다.

16:24 이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말씀하셨습니다. 오늘 예수님을 믿는 신자들에게 십자가에 대한 이해없이는 예수님을 따라가는 삶을 사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말씀합니다.

예수님께서 지신 십자가와의 만남없이는 그리스도인의 삶을 살수 있다고 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것이 바로 자신이 가는 십자가의 길을 경험해 보지않고는 십자가의 길, 주님의 가신길을 이해할수 없고 감당할수 없다는 것입니다. 자기를 부인한다는 것은 우리가 치르러야할 희생에 요구가 너무나 많습니다. 세상의 즐거움과 쾌락, 구별되고 거룩한 삶, 악인의 길, 죄인의 길, 오만한 자리에 가지않고 앉지 않아야하는 희생을 요구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를 따르는 삶은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를 것을 요구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신자는 마르지 않는 십자가의 감동이 있어야 한다.’

예수님이 지신 고난의 십자가를 함께 지는 신자에게 바울이 고백합니다.

2:20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아멘

늘 우린 이런 진실한 고백을 하면서 살아가기를 원합니다. 나는 죽고 예수로만 사는 삶을 살아가고 싶다는 것이

우리의 다짐이고 소망입니다.

신자가 예수님의 복음의 말씀을들을 때 마다 나타나야하는 마음의 울림은 마르지 않는 샘물처럼 생동감이 살아나야 합니다. 십자가만 생각해도 울컥거리는 감동이 있어야 하고, 나를 위해 죽으신 예수님을 생각할때도 내가 죄인중에 괴수였음을 고백하면서 머리가 숙연해지고 회개의 마음이 우러 나와야합니다.

하늘의 모든 영광을 버리고 낮고 천한 이땅에 오셔서 자신의 모든 것을 버리신 희생적인 삶을 볼때는 끊임없이 나를 부인하고 자꾸 십자가앞으로 가야한다는 촉박한 마음이 우리안에 있어야 합니다.

우리안에 단단해져 버린 굳어버린 냉냉한 가슴은 예수님의 십자가의 말씀과 찬양을 부룰 때 산산히 부서져야 합니다.

저와 여러분이 마르지 않는 십자가의 감동이 인생을 사는동안 계속되어지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

 

! 죄없으신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시기위해 골고다 언덕을 오르셨을까? ! 죄없으신 예수님이 누구에 의해 돌아가셨을까?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죄가 없으신 분입니다. 요한일서 3:5 그가 우리 죄를 없애려고 나타나신 것을 너희가 아나니 그에게는 죄가 없으니라. 이방인 로마의 빌라도 총독역시 예수님이 죄가 없음을 시인합니다.

23:4빌라도가 대제사장들과 무리에게 이르되 내가 보니 이 사람에게 죄가 없도다 하니

14:보라 내가 너희 앞에서 심문하였으되 너희가 고발하는 일에 대하여 이 사람에게서 죄를 찾지 못하였고

22 빌라도가 세 번째 말하되 이 사람이 무슨 악한 일을 하였느냐 나는 그에게서 죽일 죄를 찾지 못하였나니 때려서 놓으리라 하니

죄가없으신 예수님은 우리의 죄를 담당하시기위해서 십자가의 길을 선택하신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신 것은 첫째. 빌라도총독, 이스라엘 산헤드린공회원들과 백성들의 합작품으로 예수님을 죽임

23:21그들은 소리 질러 이르되 그를 십자가에 못 박게 하소서 십자가에 못 박게 하소서 하는지라

23그들이 큰 소리로 재촉하여 십자가에 못 박기를 구하니 그들의 소리가 이긴지라

빌라도 총독이 죄가 없는 것이 아닙니다. 그는 로마인의 사형제도를 사용합니다. 로마군인들로부터 손과발에 못박게 한 십자가를 세운것도 로마 군인들입니다. 예수님의 옆구리를 찌른것도 로마인의 창입니다. 그러므로 유대인들보다 이방인들이 예수님을 쳐형한 일에서 훤씬 더 많은 역할을 했습니다. 그리고 산회드린공회원들 장로들, 서기관,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과 백성들의 합작품으로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게 했습니다.

산헤드린공회원들은 모든 백성들이 예수님의 말씀에 매료되어 예수님을 따르는 것을 싫어했습니다. 그래서 자신들의 기득권을 얻기 위해 예수님을 십자가에 죽게 했던것입니다. 정치,권력을 백성들로부터 누리기 위해서말입니다.

 

둘째. 하나님의 뜻에 정해진것입니다.

53:10 여호와께서 그에게 상함을 받게 하시기를 원하사 질고를 당하게 하셨은즉 그의 영혼을 속건제물로 드리기에

구약의 이사야선지자가 예언한것처럼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은 인류의 구속의 목적을 이루시기 위해서입니다. 예수님은 죄인된 우리를 구원하시기위해서 구약의 희생되었던 동물의 피가 죄를 속하므로 속죄의 제물이 된것처럼 예수님 역시 죄인된 우리를 위해 대신 십자가에 죽으신 속건제물이 되신것이라는 것입니다.

13:11이는 죄를 위한 짐승의 피는 대제사장이 가지고 성소에 들어가고 그 육체는 영문 밖에서 불사름이라

12그러므로 예수도 자기 피로써 백성을 거룩하게 하려고 성문 밖에서 고난을 받으셨느니라

13그런즉 우리도 그의 치욕을 짊어지고 영문 밖으로 그에게 나아가자

구약의 속죄의제물은 제단에 뿌려지고, 피 외에는 성문밖에서 태워야했습니다. 유대인들은 죄를짓고, 부정한자들은 거룩한 성 예루살렘성안에서 죽을수 없기 때문에 예루살렘성전 밖에서 죽였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죄를 속하기위해서 속죄제물이 되셨기 때문에 영문밖인 골고다언덕에서 죽으셨습니다. 골고다언덕은 예루살렘 성전밖에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무거운 십자가를 지시고 오르신 골고다언덕에서 가슴을 치며 울면서 뒤따라오던 여인들을 향하여 하신 말씀은 23: 28 예수께서 돌이켜 그들을 향하여 이르시되 예루살렘의 딸들아 나를 위하여 울지 말고 너희와 너희 자녀를 위하여 울라

예루살렘 딸들아 나를 위해 울지 말고 너희와 너희자녀를 위하여 울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렇다면 오늘 우리는 누구를 위해 울어야 할까요? 1. “를 위하여 울어야 합니다.

십자가는 나를 위해서 울어야 할 십자가이며, 그 눈물을 통해 나를 구원해야 할 십자가입니다. 바울이 죄인중에 괴수라고 고백한것처럼 오늘 우리는 주님! 제가 죄인중에 괴수가 바로 접니다, 라고 고백해야 합니다.

변화되지않는 나를 위하여 울어야하고, 성장되지 않고 어린아이에 머물러있는 나를 보면서 울어야하고, 예수님의

사랑에 메말라버린 나를 보면서 진심으로 울어야 합니다.

우리안에서 너무나 오랫동안 가지고 있던 내면의 상처, 쓴뿌리, 견고한 진은 무너지지 않을 것 같은 여리고성처럼

2중으로 두텁게 쌓여져 철옹성같이 보이지만 그러나 하나님께서 이 성을 무너뜨리게 하셨던것처럼 우리안에 있는 상처들은 반드시 치유되어야 할 부분이라는 것입니다.

치유는 오직 예수그리스도 밖에 없고, 누구든지 십자가앞에 나와서 울어야 합니다. 울지않으면 치유되지않습니다.

상처는 그대로 남아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너희를 위하여 울라고 하신 것은 먼저 내 자신이 십자가로 치유받아야 할 영혼이라는것입니다.

나를 치유해달라고 하면서 기도할 때 어쩔때는 너무나 억울하여 통곡할때도 있고, 감정의 복받쳐 슬피울때도 있을것입니다. 너무나 괴로워서 그만 기도를 하고 싶을때가 있을것입니다. 그런데 성령께서는 계속 우리를 치유하시기위해 십자가앞에 앉을때마다 자신의 모습을 비추어주시면서 아픔과 괴로움을 드러내면서 울면서 치유해가실것입니다.

 

사랑하는 은성교회 성도님! 여러분 자신을 위해 예수님앞에 나와 울어야 합니다. 울면서 회개하면서 자신의 내면에 메말라버렸던 냉가슴은 조금씩 문을 열게 되어 여명의 빛처럼 내안으로 들어오셔서 나를 십자가에 앞에 주저앉게 하십니다. 성도님!! 삶이 힘들시죠. 인생을 버티면서 살아가신 성도님! 힘들수록 더욱더 주님을 찾아야합니다.

이 힘든세상에 그래서 더 많이 울어야 합니다. 그래야 영혼의 씻음을 받습니다. 그때서야 우리 마음안에서 우러나오는 단어가 바로 용서라는 단어와 사랑이라는 단어가 보이기 시작하실것입니다. 아직 완전하지 않치만 그러나 자신이 마음이 치유되면서 향한 용서와 사랑을 할수 있게 하는 힘이 생기게 될것입니다

 

어느 목사님이 일 때문에 택시를 타게 되었습니다. 택시를 타고 가는중에 운전기사님께 이런 질문을 합니다

기사님! 왜 사십니까? 하고 질문을 던져답니다. 그런데 운전기사님이 한참 있다가 이런 대답을 합니다.

자식 새끼들 때문에 살지요...“ 라고 대답을 했답니다. 그러면서 비식 웃음만 짓더라는 것입니다.

여기에는 철학적 질문도 대답도 있는것이 아닙니다. 사람들은 왜 사는지를 모르고 살아간다는것입니다.

! 자신이 무엇을 위해 사는지를 모르기 때문에 사는 것이 허무하다고 생각한것입니다.

저는 자식을 위해 아무것도 희생도 하지 말라는 말이 아닙니다. 적어도 우리가 왜! 이땅에 사는 이유는 알고 살아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삶의 존재의 이유를 모르기 때문에 소망도 희망도 꿈도 포기한채 생을 마감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사는 이유를 알기 때문에 우리가 울어야 할 대상자가 있는것입니다.

 

2.두번째 우리는 누구를 위해 울어야 할까요? 너희 자녀를 위하여 울라고 하십니다.

십자가는 자녀를 위해 울며 가족을 구원케 하기 위해 울어야 합니다. ! 예수님께서는 너희 자녀를 위하여 울라고 하셨을까요? 바로 심판이 있기 때문입니다. 바로 그뒤에 울어야할 이유에 대하여 말씀하십니다.

29보라 날이 이르면 사람이 말하기를 잉태하지 못하는 이와 해산하지 못한 배와 먹이지 못한 젖이 복이 있다 하리라

30그 때에 사람이 산들을 대하여 우리 위에 무너지라 하며 작은 산들을 대하여 우리를 덮으라 하리라

31푸른 나무에도 이같이 하거든 마른 나무에는 어떻게 되리요 하시니라

한마디로 멸망으로 인한 심판이 있음을 예언합니다. AD33년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시고, AD70년 로마의 디도장군이 예루살렘에 멸망시키러 수많은 군사를 이끌고 쳐들어왔습니다. 실제 이 전쟁에 지휘관의 자격으로 참석했던 역사가 요세푸스(Josephus)유대 전쟁기에서 많은 젊은이들이 전쟁에서 죽었고, 갓난아기, 어린이, 임산부, 노인과 여인들 수백만명이 죽었다고 합니다. 심지어는 굶주림에 지친 부모들이 아이를 잡아먹는 일까지 일어났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

부모에게 있어 자녀를 잃는 고통보다 더 큰 고통은 없을것입니다. 따라서 자녀를 가졌다고 기뻐하던자들이 예루살렘을 멸망시킨날에 자녀를 잃는 극도의 슬픔에 잠길것이고그들의 고통과 슬픔은 극에 달할 것임을 말씀합니다. 본절은 바로 이러한 슬픔을 전제로 하여 심판의 환난의 때에는 차라리 자녀가 없는 이들이 상대적으로 복이 있다는 예수님께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심판이 너무나 잔인하고 견딜수가 없기 때문에 차라리 자기들위에 산들이 무너져 죽기를 바란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주님의 재림의 때와 같이 예수님을 믿지 않는 자녀들이 교회를 떠난 자녀들이 결국 부모님이 울어주지 않음으로 말미암아 무서운 심판을 받게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울어야하는 대상은 돌아오지않는 내 남편과 아내그리고 부모님과 형제.자매를 위하여 울어야합니다. 결국은 비참한 결과를 가져오게 됨을 예수님께서는 예언하고 있습니다.

 

지금은 너희와 너희 자녀들을 위하여 울어야할 때입니다.

23: 28 예수께서 돌이켜 그들을 향하여 이르시되 예루살렘의 딸들아 나를 위하여 울지 말고 너희와 너희 자녀를 위하여 울라

서울에 있었던 이태원 사건을 우리는 잘압니다. 150명이 넘는 젊은 1020대 청소년.청년들이 그 좁은길에서 압사당하여 숨조차 쉬지못하고 죽어갔습니다. 어떤 부모님은 용돈을 주면서 갔다오라고 , 또 신혼부부가 놀러가서 남편은 살고, 아내가 죽는일이 벌어졌고, 간호사 시험에 통과하여 첫 출근을 준비하는 어린 청년. 수많은 아픔과 슬픈소식에 한순간에 날벼락같은 소식을 들은 부모님의 심정은 어떻게 말할수 있겠습니까? 그곳에 보낸 부모님의 마음은 얼마나 큰 죄책감을 살아가겠습니까? 우리 여기서 깨달아야합니다. 잊어서는 안됩니다. 우리도 외에일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울어야합니다. 사랑하는 자녀들이 교회에 나오지않고, 세상에서 빠져 살아가고 있는데도 그것을 외면하고 있다면 부모님은 하나님앞에서 큰 잘못을 하고 있습니다. 지옥과 천국이 있고, 심판과 영생이 있음을 알고 있음에도 방임하고 방치한다면 그뒤 감당을 어떻게 하실려고 방치하고 있습니까?

 

예수님께서는 오늘 부모님에게 그리고 먼저 믿는 우리에게 분명한 비밀을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골고다 언덕을 오르시며 슬피 울고있는 여인들에게 비밀의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너희 자녀를 위하여 울라고 말씀하십니다이 말씀은 예수님 때문에 가슴을 치며 슬퍼하는 여인들에게 가르쳐 준것입니다. 부모가 자식을 위해 울며 그 자식은 절대로 세상으로 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님! 우리는 다시 시작해야 합니다. 다시 십자가앞에 나와서 울어야 합니다

오늘의 말씀을 기억하면서 십자가사랑은 곧 있을 심판에서 벗어날 수 있고, 구원을 받을수 있도록 우리는 울어야 합니다. 예루살렘 딸들아! 나를 위하여 울지 말고, 너희와 너희자녀들을 위하여 울라고 말씀하신 말씀이 우리 가슴에 새겨져야 합니다. 이 한주간 다시 십자가앞에 나와서 여러분의 흐느끼는 울음소리에 하늘에 하나님께서는 사랑하는 가족들과 형제.자매들이 주님앞으로 돌아올수 있도록 발걸음을 재촉하실것입니다. 다시 주님앞에 서있는 한주간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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