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9.17.
채인기 목사
성경본문 : 마태복음 15:21-28절 / 막7:24-30
제목: 수로보니게여인의 큰 믿음
사람에게는 육적인것과 영적인 것이 있습니다. 그래서 영혼이 있는 사람이라고 말합니다. 영적인 기준을 볼 때 ‘삶과 죽음의 갈림길’은 철저히 하나님의 손에 븥들려 있습니다. 신자에게서 아직 이 땅에 남아있는 이유가 크게 두가지 있다고 말합니다다.
첫째. 아직 하나님의 나라(천국)로 들어 갈 실력이 안되기 때문이다. / 이 실력은 구원의 확신, 믿음의 장성함을 의미할것입니다. 둘째. 우리를 통해 하나님이 하실 일이 남아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땅에서 신자가 성화라는 단계에서 영화의 단계로 넘어가게 되는데, 성화는 우리안에 있는 자아인 감정과 지성과 의지가 계속해서 거듭난 영혼이 날마다 새로워져가는것입니다 즉 예수님을 믿으면 거듭난자로써 주님의 뜻과 목적을 위해 빛과 소금의 역할을 감당하다가 주님이 부르실때에 우리는 영화즉 천국에 이률수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어떤 문제나 상황이 발생하여 예수님께 찾아오게 되면 항상 말씀하신 것은 “믿음”입니다.
너의 믿음이 작구나 또는 네 믿음이 크도다“ 또는 네 믿음대로 될지어다 라는 말씀을 하십니다. 유독 믿음과 연관지어 말씀하신 것을 보게 됩니다. 그렇다면 구원이 예수그리스도를 통하여 그분을 믿을 때 구원이 이루어진다는 것이고, 어떤 문제나 상황이 발생하게 되면 그 사람의 믿음을 통하여 역사하신다는 것입니다.
본문은 가나안 여인의 믿음과 그 딸의 치유의 사건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갈릴리 사역을 하신 후 잠시 가나안땅 두로와 시돈 지역으로 들어가십니다. 이곳은 이방땅입니다.
가나안땅의 수로보니게 여인이라는 여자가 예수님께 찾아와서 자신의 딸이 귀신들렸으니 고쳐 달라고 간청합니다.
가나안 여인의 간청에 예수님께서는 일차적으로 거절을 하십니다. 거절당하지만 이 여인은 예수님께 자기를 불쌍히 여겨 귀신들린 자신의 딸을 고쳐 달라고 예수께 재차 간구합니다.
예수께서 자신은 이스라엘의 잃은 양을 위해서만 보냄을 받았다고 냉담하게 대답하시지만 가나안 여인의 믿음에 대한 예수님의 칭찬과함께 여인의 간청을 응답하십니다. 예수님께서 비롯 이방여인이지만 믿음이 크다고 칭찬하시면서 그의 딸이 나았음을 말씀하십니다.
오늘 이방여인이지만 수로보니게 여인을 믿음을 보면서 예수님께서 왜! 믿음이 크도다 라고 말씀하셨는지를 진정한 믿음이 무엇인지 함께 집중적으로 나누고자 합니다.
마태복음에는 가나안여인으로만 나오지만 마가복음에서는 이방여인 수로보니게 여인으로 나오게 됩니다.
1.가나안여인 수로보니게 여인은 자신에게 무슨 문제가 있길래 예수님을 찾아왔을까?
15:22 가나안 여자 하나가 그 지경에서 나와서 소리 질러 이르되 주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내 딸이 흉악하게 귀신 들렸나이다 하되
여인에게 가장 큰 문제는 자신의 딸이 흉악하게 귀신들렸다는 것입니다. 흉악하다는것은 여인의 딸은 귀신들림으로
인하여 육체적 질병을 가졌을 뿐 아니라 도덕적으로도 나쁜 행실을 가졌으며 자신과 남을 위험하게 하는 행동도 하였다는 것입니다. 자신의 딸이 흉악한 귀신들려서 고통가운데 자신뿐만 아니라 다른사람까지 위협을 주고 있다면 이것보다 심각한 상황이 어디있습니까? 만약 내 가족이 이런 고통을 당하고 있다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너무나 괴로울것입니다. 어쩌면 상상만해도 너무나 힘이 들것입니다.
이 여인은 아무도 자신의 절박한 문제를 해결할수 없기에 그는 생각합니다.그리고 예수님을 찾아갑니다
22절에 보면 그 지경에서 나왔다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그 지경이라는 의미는 ~로부터 분리되어 나아가다’ 뜻으로
수로보니게여인은 자신이 사는 집에서 예수님이 계신곳까지 먼거리를 떠났다는 것입니다. 그녀는 오직 자신의 딸의 병을 고칠 수 있는 방법은 예수님를 의지하는 길밖에 없다는 확신을 가지고 살던 곳을 떠나 먼길을 걸어서 예수님을 찾아 나선것입니다.
먼길을 찾아 나선 수로보니게의 여인에게 볼수 있는 것이 무엇입니까? 간절함과 절박한심정입니다 그리고 확신을 가지고 주님을 만나고자 먼길을 갑니다. 주님만이 내 딸을 낫게 하실수 있다는 확신 때문에 말입니다.
가나안여인의 수로보니게에게서 귀신들린 딸의 고침읇 받고 싶어하는 간절함과 확신은 어느정도일까요?
22 가나안 여자 하나가 그 지경에서 나와서 소리 질러 이르되 주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23. 예수는 한 말씀도 대답하지 아니하시니 제자들이 와서 청하여 말하되 그 여자가 우리 뒤에서 소리를 지르오니 그를 보내소서
25. 여자가 와서 예수께 절하며 이르되 주여 저를 도우소서
27. 여자가 이르되 주여 옳소이다마는 개들도 제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나이다 하니
수로보니게 여인은 주님앞에서 자신의 딸을 살리기 위해서라면 많은 사람들이 있을지라도 큰 소리로 소리를 지릅니
다. 주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겨달라고 말입니다. 소리를 지르는데도 예수님이 말씀이 없으시자 다시 소리를 지릅니다. 이 소리는 절박한 한 어머니의 타는 목마름의 소리입니다. 이 여인의 소리는 주님 자신을 도와달라는 절박한 소리입니다. 자신을 불쌍히 여겨달라는 간절하고 애달픈 소리입니다
이 여인처럼 자식이 귀신들려 자신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까지 위협할정도로 행동을 하고 있다면 우리는 수로보니게의 여인의 절박함이 느껴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 여인은 예수님앞에서 끝까지 믿음과 확신으로 버티고 있습니다.
만약 내 딸이 내 자식이 이런 상황이라면 우리는 어떤 반응을 보이시겠습니까? 희망이 없이 하루하루 한숨을 쉬면서 자신의 운명이라고 한탄하시겠습니까? 아니면 오직 희망은 예수님 밖에 없다고 생각하면서 먼길을 떠나서라도 주님을 만나기위해 길을 나서겠습니까?
제자들의 행동을 볼까요? 계속 소리를 질러대니까 너무나 귀찮아서 예수님께 요청합니다. 23절 그여자가 우리 뒤에서 소리를 지르오니 그를 보내소서 라고 말입니다. 제자들의 이 말은 ‘주님! 너무 힘이드니 그녀의 요구를 빨리 들어주고 보내달라’는 의미입니다. 이 여인은 절박하지만, 제자들은 귀찮은것입니다. 사람이 사는 인생이 그렇습니다. 어떤 사람에게는 절박한 마음으로 울부짖지만 또 어떤 사람은 냉담하게 모른체 하면서 살아가기도 합니다.
아무도 없는 외로운 시간, 자신 혼자만이 있다고 생각하는 시간을 보내면서 우울함과 외로움을 달래기 위해 마약을 하거나 쾌락을 쫓아 살아가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사회적으로 심각해지고 있는 것이 있는데 초중고, 대학생까지 마약의 손이 들어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정신적으로 나약하여, 현실이 싫고 두려워서 환청이나 환각상태에 있는 것을 좋아한다는 것입니다. 이런 현실에서 어떻게 우리 자녀들이 끝까지 예수님을 바라볼수 있도록 하겠습니까?
정말 부모님의 눈물의 기도가 필요할때입니다. 자녀를 위해 눈물로 기도하신분은 절대로 헛되지 않을것입니다.
어떤 목사님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특별히 기도할 때 예수님이 귀가 먹었냐? 큰소리로 부르짖게 작은 소리를 해도 다 들으신다. 통성기도를 하지말라고 말씀하신분들도 계십니다. 그런데 만약 자신의 자식이 죽어가는데 어떤 부모가 절박한 목소리로 살리수 있는분에게 간청하지 않겠습니까? 큰소리로 도와달라고 하지않겠습니까?
우리는 수로보니게의 여인의 절박한 심정의 소리가 내귀에 내 마음에 들려야합니다. 간절함이 없는 신앙은 절대로 치유가 일어나지 않습니다. 끈질기게 간절함이 없는 기도는 역사하지 않습니다.
저희 아버님이 뇌출혈로 아파트 수위로 일하시다가 쓰러지셨습니다. 골든타임을 이미 놓쳤습니다. 저는 새벽기도를 끝나고 아버님을 모시기위해 아파트 조그마한 수위실에서 쓰러지신 아버님을 보았습니다. 그날은 1월 겨울이었습니다. 저는 얼른 쓰러지신 아버님을 모시고 하당 기독병원으로 갔습니다.
의사는 빨리 뇌수술을 해야한다고 하면서 가망이 없을 것같다고 하면서 모든 식구들을 부르라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뇌수술할때마다 저는 수술사고에 병원에 책임이 없다는 각서를 3번이나 썻습니다. 이때 제가 할수 있는 것은 하나님께 기도하는것밖에 없었습니다. 저는 기독병원 중환자실 차가운 바닥에서 무릎끊고 큰소리로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저희 아버지를 살려달라고 말입니다. 그때는 절박한 심정과 간절함으로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저의 간절함과 절박한기도를 들으시고 생명을 7년을 연장해 주셨습니다.
또 저는 결혼해서 11년간 아이가 없었습니다. 그 긴시간 하나님께 금식하며 기도하며, 저녁늦게 양울산에 아내와 함께 올라가서 기도했습니다. 조립식 집에서 비가 와서 비가 새내는데도 아내와 둘이 손잡고 하염없이 울면서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아이 하나만 주십쇼! 한 생명만 주시라고 정말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주신다고 약속은 하셨지만 그 약속이 이루기까지 11년이 걸렸고 하나도 둘도 아닌 3자녀를 주셨습니다. 목회를 하기위해 신학교를 갈때에도 등록금이 없어서 다니면서 하나님께 기도할때에 하나님은 놀라운 방법으로 해결주셨습니다. 이 교회를 세울때에도 수많은 난관과 어려움이 있었습니다. 교회를 리모델링하다가 9개월동안 중단되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주님앞에 나와 간절함과 절박한 심정으로 기도할때에 한번도 외면한적이 없고 다 들어주셨습니다.
지금 우리는 9월한달 릴레이기도를 하고 있습니다. 우리 기도에는 기도응답을 받고 싶어하는 절박함과 간절함이 있어야 합니다. 성도님! 9월 남은 기간동안 다시 힘을 내서 수로보니게의 여인처럼 예수님앞에 낱낱이 자신의 심정을 토로하면서 절박한 심정으로 간구하시기를 바랍니다./ 답답함이 오면 때로는 소리를 지르고, 무너질것같은 마음이 오면 주님 도와주세요! 주님밖에 도울분이 없습니다. 라고 큰 소리로 기도하고/ 꼭 기도응답을 받아야할 문제이면 주님 저를 불쌍히여겨주시길 원합니다. 라고 간절한 기도가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수로보니게의 여인의 간청에도 아무런 말씀이 없으시는 예수님을 봅니다
이해할수 없는 예수님의 행동과 말씀
23 23예수는 한 말씀도 대답하지 아니하시니 제자들이 와서 청하여 말하되 그 여자가 우리 뒤에서 소리를 지르오니 그를 보내소서
24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나는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 외에는 다른 데로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노라 하시니
왜! 예수님께서는 가나안여인의 간청에 아무러 대답을 하지 않았을까요? 그렇게 큰 소리로 도와달라고 외쳤도 왜! 아무런 대답을 하지 않고 오히려 자신은 나는 이스라엘집의 잃어버린 양외에는 다른데로 보내심을 받지 않았다고 말씀하셨을까요? 우리는 이해할수 없는 예수님의 행동과 말씀을 봅니다. 예수님은 유대인 이스라엘백성만 중요하고 다른 나라와 민족은 중요하지 않다는 말씀입니까?
우린 여기서 중요한 의미가 숨겨져있습니다. 예수님은 유대인이나 헬라이나 이방인이나 누구나 구원을 하실려고 오셨습니다. 누구든 예외에없이 병을 고치시고 치유와 회복을 해주셨습니다.
구원의 우선순위가 유대인이고 그 다음이 이방인이라는 말씀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유대인들은 구약의 메시아이신 예수님이 이스라엘땅에 왔는데도 이들은 부인하고 믿지않고 있습니다. 구원에서 멀어지고 있는것입니다. 예수님은 잃어버린 양 자신의 동족 이스라엘백성을 구원함이 먼저였던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사역하시면서 이방인 백부장의 간구도 들어주셨습니다. 예수님은 거부의 행동과 말씀을 하시면서도 수로보니게의 마음을 들어다보고 계셨습니다. 이 여인의 믿음을 시험하고 측량하고 계셨던것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은 이방 여인 수로보니게의 무엇을 보고 계실까요?
예수님은 여인의 간청에도 불구하고 아무런 조치를취하지 않고 유대인의 구원이 먼저라고 말씀하시지만 정작 예수님은 이여인에게 무엇을 보시고 계신가를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여인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28이에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여자여 네 믿음이 크도다 라고 말입니다. 예수님은 치유하지 않을려고 하신 것이 아니라, 이방여인의 믿음을 보실려고 했던것입니다.
예수님은 수로보니게 여인의 믿음을 보셨던것입니다. 그런데 이여인의 믿음을 크도다 라고 말씀하십니다. 믿음이 크다는 것은 양적으로 많다는 의미가 있지만 질적으로 많다는것입니다. 다시말해서 이 여인은 예수님이 누구신지를 알았다는 것입니다. 자신의 유대인들은 고백하지 않는 말을 수로보니게 여인은 고백합니다. 무엇입니까? 22절 주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겨달라는 고백입니다. 이 여인은 구약의 메시야가 예수님이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여인의 신앙은 바른신앙이었습니다. 여인은 당신이 다윗의 혈통에서 나신 예수그리스도이심을 고백하고 있는것입니다.
수보니게의 여인이 큰 믿음이라고 칭찬을 받은 이유는 무엇일까?
26대답하여 이르시되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하지 아니하니라
27여자가 이르되 주여 옳소이다마는 개들도 제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나이다 하니
말씀을 잘보시면 예수님께서 자녀와 개를 대조합니다. 자녀는 유대인 즉 같은 동족인 이스라엘백성들을 의미하고
개들은 이방민족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26절 말씀의 의미는 자녀인 이스라엘백성들이 먼저 먹어야한다. 자녀들의 빵을 빼앗아서 개에게 이방인에게 던져주는 것은 옳지 않다. 의미이다. 개가 아무리 주인으로부터 귀여움을 받는다고 할지라도 ‘자녀’와 같은 대우를 받지 못한다는 말씀이니다. 즉 구원의 우선권이 유대인에게 먼저 있다는 것이지 이방인의 구원이 없다는 말씀이 아닙니다.
이때 수로보니게의 지혜롭고 훌륭한 대답을 볼수 있습니다.
27절 주님말씀이 옳습니다. 수로보니게여인은 이방인을 유대인과 구별하여 자신의 요청을 거절하는 예수님의 말씀에 전적으로 동의합니다 예수님은 개에 비유하는 말씀에 정적으로 겸손하게 동의하면서 자신의 집안에 기르는 개들도 주인에 의해 누릴수 있는 혜택이 있듯이 자신도 개처럼 누릴수 있다는 것을 고백합니다. 그러면서
개들도 제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나이다 라고 고백한 것은 자신이 유대인들에 의해 개로 취급받는 이방인으로서 결코 유대인의 왕으로 오신 그리스도께서 베푸시는 구원과 은혜의 식탁에 참예하는 것이 허락될수 없음을 알지만, 개가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을수 있는 것과 같이 비록 이방여인이지만 예수그리스도께서 자기 백성에 베푸시 부스러기인 은혜의 일부는 자신도 누릴수 있다고 말하고 있는것입니다.
예수님은 이 여인의 고백을 들으신후 어떤 감동을 받으시고 그녀의 간청에 응답하여 주십니까?
28이에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여자여 네 믿음이 크도다 네 소원대로 되리라 하시니 그 때로부터 그의 딸이 나으니라
28Then Jesus answered, 'Woman, you have great faith! Your request is granted.' And her daughter was healed from that very hour.
예수님은 수로보니게의 고백을 듣고 난후 엄청난 큰 칭찬을 하시는데 그를 great faith 위대한 믿음, 큰 믿음이라고 말씀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왜 이렇게 위대한 믿음, 믿음이 크도다 라고 말씀하셨을까?
기대를 훨씬 넘어서는 가나안 여인의 큰 믿음에 대하여 너무나 감격한 예수님의 감정이 이 단어를 통해 잘 드러나고 있다. 바로 얼마 전에 자신과 함께하고 있는 주님의 제자들조차 믿음이 적어 의심하는 불신앙을 보이는 것을 경험하였기에(14:31) 더욱 그 감격이 크셨을것입니다.
예수님이 기뻐하신 것은 바로 믿음입니다. 성도가 이땅에 살면서 하나님이 말씀하신 것을 의심치않고 믿고 순종하는 것을 기뻐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신 것은 성경은 무엇이라고 말씀합니까?
히11:6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은 믿음이라는 것입니다. 신자는 예수님을 믿는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살아계시고 그분을 찾는자들에게 영생과 구원을 주심을 믿는 것을 좋아하신다는 것입니다.
나로부터 시작된 믿음은 사실은 믿음이 아니라 신념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주님의 말씀을 믿는 신앙을 갖는것이지,
나의 생각과 사고와 경험을 하는 신념은 아닙니다. 신앙이란 하나님을 바라보는 행위이고, 신념이란 내 생각을 믿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의 믿음이란 “그리스도 안에서 주어진 하나님의 약속을 믿는것이고, 그리스도안에서 말씀을 통하여 행하실 일들을 믿는것입니다.
그렇다면 큰 믿음, 위대한 믿음과 작은 믿음은 어떻게 평가 받을수 있습니까?
큰 믿음 (Great faithj) 무엇인가?
첫째는 환경을 이기는 믿음입니다. 첫째는 자신의 환경을 이기고 둘째는 무시와 조롱을 이겨냅니다.
셋째는 믿음을 포기하지 않고, 말씀에서 물러허지 않습니다.
첫째.22. 가나안 여자 하나가 - 수로보니게여인에 환경은 이방여자인 가나안 여자입니다. 당시 유대인들이 상종하지 않는 민족입니다. 철저하게 유대인들로부터 외면당하는 민족입니다.
둘째.26.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하지 아니하니라 – 예수님께서 말씀중에 개라고 표현하고 개에게 떡을 던지는 것이 아니다 라는 말씀합니다 수로보여인은 무시와 조롱을 당하는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꿋꿋하게 예수님께 간청을 합니다.
셋째 27.개들도 제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나이다 - 자신의 환경과 무시와 조롱에도 한발짝도 물러서지 않고 자신의 처지를 이겨냅니다. / 그렇습니다. 이 여인도 예수님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을수 있는 혜택이 있다고 뒤로물러서지 않는 믿음을 보인것입니다. 어디서 이런 담대함이 나올까요? 단 하나입니다.
가나안여인 수로보니게에게는 무섭운 집중력이 있습니다. 그것은 확신입니다. 이 확신이 결코 흔들리지 않았기 때문에 환경과 무시와 조롱도 어떤말에도 뒤로 물러서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위대한 믿음이라고 소리를 듣습니다. 어떤 확신입니까? 예수님께로 가면 모든 것이 치유된다는 확신입니다. 모든 것이 해결된다는 확신입니다.
삶에서 실천사항입니다. 이제부터 여러분! 환경과 상황에서도 무조건 예수님을 찾으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을 찾는다는 말은 주님의 말씀을 기억하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성경의 말씀을 가지고 계속 입술로 고백하면서 삶의 환경과 상황을 이겨내라는 것입니다.
성경에 고후 4:7우리가 이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으니 이는 심히 큰 능력은 하나님께 있고 우리에게 있지 아니함을 알게 하려 함이라
8우리가 사방으로 욱여쌈을 당하여도 싸이지 아니하며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낙심하지 아니하며
9박해를 받아도 버린 바 되지 아니하며 거꾸러뜨림을 당하여도 망하지 아니하고
10우리가 항상 예수의 죽음을 몸에 짊어짐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
보배이신 예수님을 우리가 가졌습니다. 그리고 삶을 이겨낼수 있는 능력은 우리에게 있지 않고, 하나님께 있음을 입술로 마음으로 인정하시고 고백하시길 바랍니다. 이 말씀을 믿으십니까?
그리고 8.9절 환경과 상황에서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하여도 싸이지 않고, 문제앞에 답답함을 당하여도 절대로 낙심하지 않고, 문제와 상황에서 박해를 받아도 주님이 나를 버리지 않으시고, 거꾸러뜨림을 당하여도 죽을것같은 상황이나 문제에도 우리는 절대로 망하지 않는다는 확신을 가지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 말씀을 믿고 확신하십니까 ? 세상을 이길 능력이 나에게 없고 하나님께 있음을 믿습니까? 아멘 그렇다면 이 말씀이 여러분의 삶에서 증거로 나타나도록 계속 외우시고 큰소리로 외치시고 기도할때에도 이것을 가지고 기도하시길 바랍니다.
왜! 이 말씀이 능력이 있냐면? 10절 우리에게는 항상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의 생명이 우리에게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기 때문입니다. 절대로 수로보니게 여인처럼 뒤로 물러서지 마시길 바랍니다.
모든 문제를 가지고 예수님께로 오시면 다 해결됩니다. 이것을 믿습니까? 아멘 그러면 말씀을 믿고 실천하시길 바랍니다. 이것이 예수님이 기뻐하시는 위대한 믿음, 큰 믿음입니다.
작은 믿음 (little faith)
예수님께서는 15장에서는 이방여인 수로보니게 큰 믿음을 보여주시고, 14장에서는 제자들을 통하여 작은 믿음을 대조하여 보여주십니다.
마14:29오라 하시니 베드로가 배에서 내려 물 위로 걸어서 예수께로 가되
30바람을 보고 무서워 빠져 가는지라 소리 질러 이르되 주여 나를 구원하소서 하니
31예수께서 즉시 손을 내밀어 그를 붙잡으시며 이르시되 믿음이 작은 자여 왜 의심하였느냐 하시고
31Immediately Jesus reached out his hand and caught him. 'You of little faith,' he said, 'why did you doubt?'
예수님께서 물위를 걸어온 베드로를 보시면서 믿음이 작음을 책망하십니다. 베드로는 왜 작은 믿음이라고 책망받습니까? 베드로가 작음 믿음이라고 책망을 받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불신앙 때문입니다.
베드로는 엄청난 폭풍이 부는데도 예수님을 보고 걸어갑니다. 그러나 바람을 볼때에 무서워 빠져버립니다. 베드로가 실패한 이유가 무엇입니까? 예수님의 능력이 없어서가 아니라, 베드로의 불신앙 때문입니다. 그 불신앙은 예수님을 믿지 못하는것입니다. 바람을 보았다는 것입니다. 눈에 보이는 현실을 보았다는것입니다. 현실은 지금 태풍이고 세찬 바람입니다. 그래서 무섭고 두려웠던것입니다. 풍랑이 이는 바다는 어려운 환경이지만 누구를의지하느냐에 따라 결과는 달라질수 있습니다.
여러분! 인간이 살아가는데 있어서 문제는 항상 존재합니다. 그런데 그문제를 대하는 방법이 자기방식으로 하게되면 절대로 안된다는 것입니다. 자꾸 현실을 보게되면 믿음이 생기지도 보이지도 않습니다.
진짜 믿음은 깨달음이 아니라, 그것을 행동으로 움직이게 하는 힘이 바로 믿음입니다. 믿음은 믿는 것을 넘어서서 행동하는 것입니다. 삶으로 살아내는 것입니다.
수로보니게 여인은 끝까지 예수님을 바라보고 붙잡고 뒤로 물러가지 않고 간청했습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예수님을 볼때에는 물위를 걸어지만 바람이라는 환경을 보면서 물에빠졌습니다.
큰믿음과 작은 믿음의 차이가 무엇입니까? 끝까지 주님만 바라보는것입니다.
이한주간 삶에서 큰 믿음을 가지셔서 뒤로 물러가지말고 계속 예수님께 꼭 들어주시라는 간청하며 기도하는 은성교회 성도님들이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